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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어수선/코타키나발루 유배기

12. 손님 맞이 no sexy-pose

  밤새 비가 내린 덕에 아주 곤하게 잤다. 비 올 때의 기압이 내 몸에 잘 맞나보다. 아, 밤에도 짖는 개 깡패 무리가 비 오는 날이라 그런지 조용하기도 했고. 빨래며 청소를 마치고 창가를 향해 둔 의자에 앉았다. 오후 4시. 비가 점점 더 거세게 내린다. 나는 턱을 떨구고 창밖을 보면서 '이보다 더 내릴 수 있나?'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보다 더' 내린다. 맑은 날엔 겹겹이 보였던 산 뒤의 산들도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고, 딱 눈앞에 있는 산과 송전탑, 빨간 지붕 몇 개만 유난히 또렷하다. 그것들도 금세 아른아른 흐릿해진다. 우와, 동남아의 우기란 이런 것이구나. 아까 비가 좀 덜 올 때 먹을 걸 사둬서 다행이다.

 

  열흘만의 대청소였다. 그동안 깨작대며 머리카락이나 줍고 먼지 좀 닦는 시늉을 했다면 오늘은 손님맞이용 대청소! 손님이 온다. 고된 대학원 생활을 하는 친구가 여기 와 3박 4일을 머문다. 나는 내가 아침 볕을 쬐고 밤 별을 구경하던 방을 이 가여운 손님에게 주기로 한다. 대학원생이란 매일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자들이니… 이 짧은 날들이 최고로 좋았으면 좋겠다. 나는 가장 먼저 손님이 쓸 방을 비우고 내 옷과 짐들을 옮겼다. 그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얼마 전 NINSO라는 700원 마트에서 산 커다란 걸레로 집안을 싹싹 닦았다. 아무래도 이 집의 호스트가 청소하는 것보다 더 깨끗하게 한 것 같다. 새집 같다! 후후.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괜히 어깨를 으쓱댔다.

 

  손님이 오면 어디를 데리고 가야 할까? 같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도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된 여행객이면서, 마치 내가 호스트가 되어 손님을 좋은 곳으로 안내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슬쩍 어깨에 가 붙는다. 사실 이곳에 오고 열흘이 지나도록 나는 딱히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번째 숙소에서 바선생을 만난 이후 급격히 마음의 온도가 식었던 것도 있지만... 도시라는 것이 그렇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풍경들. 맥도날드, 스타벅스, 세포라. 고만고만한 안정감을 주는 것들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게 나를 무척이나 안심시키면서도 지루하게 한다. 점점 더 얼어붙는 겨울에 모든 게 녹아내리는 여름으로 왔으면서도, 나는 왜인지 익숙한 풍경에 좀처럼 설레는 마음이 들지를 않는다.

 

  이 인기 있는 휴양지는 휴양지인 이유를 빼고 나면 어떤 삶이 남는 건지 보기가 어렵다. 여기 사람들은 관광 사업 외엔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는 건지, 주로 어떤 일과를 사는지 잘 모르겠다. 휴양지인 이유를 빼고, 그 끝내주는 석양을 빼고, 시내에서 좀 더 들어가면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시내에서 좀 더 들어온 곳에 사는데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특색'이라는 것이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는 이곳이 밍밍하게 느껴지다가도, 그놈의 특색이라는 게 있는 나라들은 전부 힘 있는 나라들이었다는 걸 생각하곤 씁쓸해졌다. 밍숭맹숭,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은 모양, 이것도 섞이고 저것도 섞여 있는 모양. 쿨하긴 덜 쿨해도 그게 더 낫지, 생각을 고쳐먹어 본다. 특색, 그건 너무 힘이 세고 늘 자신만만하니까.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짧은 휴가를 보내는 이들에게 이곳은 바삐 다녀야 할 섬이다. 물놀이하고, 쨍한 햇빛 아래 사진 찍고, 시내의 큰 쇼핑몰에서 쇼핑하고, 맛집을 탐방하기에는 일주일도 짧다. 나도 처음 며칠은 여행객들을 따라 시내를 익히러 다니기도 하고, 물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손님이 오면 데리고 갈 섬을 탐방하기도 했으나, 폭죽을 터뜨리는 것 같은 여행은 아무래도 힘이 들었다. 나는 대강의 파악만 마치고 햇빛 잘 드는 이 집에 들러붙어 집 주변만 갉아대고 있다. 조금 긴 호흡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하니 며칠 만에 가진 돈을 다 탕진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래 사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나만의 호흡으로. 에잇, 그리고 아마 여기 이 외딴 섬의 외딴 놈인 나를 보러 올 정도의 손님이라면 분명 그놈도 외딴 놈일 것이다! 나는 친구와 함께 다닐 일정을 좀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뭘 예약을 혀. 아무 데나 가자. 여행지에 분위기 좋은 식당은 존내 맛없더라, 다." 크리스마스랍시고 해변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하려다, 음식이 전부 맛없어 보여 고민스럽다는 내게 저렇게 답하는 친구가 오고 있다. 친구의 가방에는 어머니가 챙겨주신 고추 참치와 김, 내가 부탁한 작은 고추장과 참기름이 들어있고, 그것들도 비행기를 탄다. 가방에 공간이 많이 남을 텐데도 친구는 여행하는 동안 가지고 다닐 작은 가방도, 잠옷도, 여름에 어울리는 선글라스도 챙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마저도 공항으로 오는 길에서야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아이고, 이런 우리는 아마 짧은 일정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쇼핑, 맛집, 어디에 써야 할지 잘 모르겠는 인생샷, 해변에서의 쎅시-포-즈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일몰에 맞추어 비가 사그라든다. 비행기가 무리 없이 착륙할 수 있겠다. 다행이다. 어서 와요, 내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