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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어수선/코타키나발루 유배기

10. 할 일 없는 하루하루 I'm Ku Jun-pyo

 

  딱 한 개의 해야 할 일, 예를 들면 '은행 다녀오기' 같은 것- 그거 하나 해내는 게 쉽지 않은 날들이었다. 끝내주는 계획이나 꽉 찬 다이어리 같은 걸 포기한 지도 오래다. 인생이 그냥 쏟아져버린 물 같다. 주워 담으려 해봐야 나만 피곤하니 증발하게 두자! 그러니 성취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낙이었던 내 작은 수첩 안엔 그날 먹은 것들과 똥은 눴는지 여부와 끊어질 것 같은 어깨와 부러질 것 같은 목 상태가 어떤지만 적었다. 나는 그걸로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오늘이 어제가 아니라는 것을 구분하며 휴직 후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답도 없고 정리도 되지 않는 나날들. 가능하면 몸 아픈 것이라도 팔아서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도시에서의 무거운 날들이었다. 애석한 것은 서울에서의 나와 코타키나발루의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점! 여기서도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만드는 건 과한 욕심이다. 여긴 그나마 27도에서 30도를 오가는 날씨라 몸은 덜 굳는 것 같지만 허리며 목, 손목이 여전히 시리고 아프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할 일 없는 하루를 보낸다. 어쩔 수 없다는 것에 속으로 조금은 웃으면서. 후후. 덜 아픈 것이다.

 

   아주 적극적으로 할 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잠을 잔다. 이토록 지구의 생명체다운 삶일 수가 없다. 아침 해가 남향의 침실 안에 누워있는 내 눈두덩이를 톡톡 치면 눈만 떠서 창밖을 보며 미적대다가, 일어나 거실에 나와 커튼을 걷고, 오줌을 누고 물을 마시고 다시 의자에 앉아 창밖을 구경한다. 날이 좋으면 저- 서쪽을 보면서 일몰 때까지 구름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침 식사로 미숫가루를 두유에 타 마시는 동안에도 창밖을 본다. 그때 꼭 밖에선 개가 짖고 닭이 운다. 대여섯 마리 되는 개 떼가 있는데 그들이 아침마다 좀 싸운다. 아 물론, 밤에도 싸운다…. "야~! 거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한 번은 꼭 해보려고 한다.

 

  이사 올 때 텅 비어있던 숙소의 냉장고는 내가 들여온 브로콜리, 올리브 절임, 홈무스, 두유, 토마토, 마늘 같은 것들로 붐비게 되었다. 이것저것 채워져 있는 냉장고를 들여다보자면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내가 자랑스러워진다. 이 낯선 곳에서의 하루하루를 이렇게 잘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이 좋아진다. 입꼬리 두 개가 자연스레 하늘을 향한다. 먹고, 자고, 싸고도 그걸 돈으로 바꾸지 못하는 내가 싫어지던 내 삶터와는 사뭇 다르다. 역시, 여행지는 여행지다. 나는 냉장고가 차 있어도 점심은 집 근처의 식당을 돌아가며 방문해서 낯설게 먹곤 하는데, 똠얌 국수, 커리 락사 국수, 생강 양파 수프… 여태까지 먹은 것 중에 실패작이 하나도 없다. 나는 매일 식사시간마다 내가 대견해지는 곳에 살고 있다. 정말이지, 좋은 일상이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우기라는데도 날이 맑다 못해 빛나는 코타키나발루에 있자면, 자꾸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뭐든 쓰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착각이다! 정신을 똑똑히 차려야 한다. 오만방자하게 몸을 놀렸다가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야 한다고. 나는 아주 적극적으로 몸을 사리며 아무-것도-안-하고-있다. 그저 생존용 운동을 하고, 끄억대며 땀을 흘리고, 밥을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햇빛에 빨래를 넌다. 빨래가 햇빛에 수분을 뺏기는 동안 나도 에너지를 뺏겨 졸음이 오면 낮잠을 잔다. 여행지이지만 이것 참,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의 유배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척 안온하다는 게 진짜 유배와 다른 점이겠지만…?

 

  중요하게 하는 일이라고는 석양을 보러 가는 것, 그것 하나다. 뜨끈뜨끈해진 침대 위에서 사경을 헤매듯 낮잠을 자고 나면 오늘의 석양이 어떨지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나는 안경까지 꺼내 쓰고 서쪽 하늘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구름이 석양을 크게 가릴 만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카메라와 삼각대, 핸드폰과 지갑, 모기퇴치제와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약, 마지막으로 방 열쇠까지 족히 6개는 달린 열쇠 꾸러미를 절그럭대며 택시를 부른다. 아, 바쁘다. 이렇게 바쁠 수가.

 

  "탄중아루 해변에 매일 간다고요? 정말?" 어떤 택시기사는 석양을 보러 매일 저녁 마실 나가는 나를 놀렸다. 그게 뭐 그렇게 특별한 석양이냐는 투였다. 탄중아루 해변을 처음 갔던 날, 내게 혼자 왔냐고 묻던 흰 머리의 할머니도 그랬었다. 손녀들이 놀러 왔으니 여기까지 나온 거지, 자기는 여기를 일 년에 한두 번도 안 와본다고. "네~ 저도 여기 살면 안 갈 거예요. 여기 안 사니까 매일 가는 거죠. 기사님도 그럴걸요?" 택시기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는다. 맞다. 기사님도 서울에 오면 내가 일 년에 한 번도 안가는 남산을 을매나 기쁘게 가겠어, 그쳐? 아, 잠깐. 그래도 매일은 아니려나? 어, 아무튼, 나는 여기 안 사니까 매일 가는 거다.후후. 여기 안 사니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자, 그럼 오늘도 가자! 석양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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