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어수선/코타키나발루 유배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19. 다시 겨울 what the hell 인생을 열심히 가위질하고 풀질하여 꾸미던 어린 시절은 끝났다. 다부지게 신발 끈을 묶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야!"를 외치던 내 안의 캔디도 죽었다. 아, 말이 좀 심했나. 죽은 건 아닐까? 아직 내 안에 살아있을까? …아…아무튼… 여행을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여기고 뭔가 큰 것을 얻거나 배우거나 해결되는 마법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제의 나는 없고 오늘부터 새로운 나!' 같은 마음을 먹는 것은 언젠가부터 하지 않게 되었다. 야속할 만큼 끊어지는 지점 없이 계속되는 게 인생이고, 이제 나에겐 생의 어느 부분도 부정하여 잘라내지 않고 그마저 다독여 걸어 나가는 게 숙제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건 가위질과 풀질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게 틀림없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나 되고 싶은 마음이 .. 더보기 18. 손님들과 움직이는 집 Alone and together 어김없이 집 안에서 멍을 때리던 어느 날이었다. 민트색 1인용 소파 위에 누운 듯 기대있던 나는 문득 눈알을 굴렸다. 사방이 조용했다. 동생은 침대방에서 한낮의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잠들어 있고, 개미들만 소리도 없이 바삐 움직이는 오후였다. '저…쓰레기통이…' 위로 올라갈수록 입구가 넓어지는 하얗고 우아한 쓰레기통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 혼자 있을 땐 내가 몸을 파묻고 사는 1인용 소파 옆에, 사흘 밤낮을 수다 떨며 보낸 친구와 함께 있을 땐 거실에서 부엌으로 가는 길목에,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자꾸 뭘 먹게 되는 동생과 있는 지금에는… 식탁 밑으로 갔군? 의식적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바꿔야지' 하고 큰맘을 먹었던 적도 없다. 이상하고도.. 더보기 17. 내 동생 Can't write an essay without Mr.Bah "언니. 만약에 누군가가 언니에게 한 달에 백만 원씩 줄 테니까 이 깜깜 산에 와서 살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당연히 살아야지." "인터넷도 없고, 재밌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없으면 고맙지." "그러면… 바선생이 나오면? 엄청 큰 게 막 나와." "그럼 안 하지." "언니. 그러면, 만약에 한 달에 천만 원씩 주면?" "……." "그런데 잡아주는 사람도 있어. 그러면 어떡할 거야?" "하루에 몇 마리나 나오는데?" "일주일에 한 마리 정도?" "그러며언…." "그런데, 그 잡아주는 사람이 매번 잡아줄 때마다 엄청 생색을 내고, 언니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티를 팍팍 내. 그러면 어떡할래?" "……." "언니. 그러면, 만약에 일 년에 일억을 주고, 바선생 잡아주는 사람도 있어. 일주일에 한 마리고.. 더보기 16. 방역 전문가의 등장 Mr.Bah III 나뿐만이 아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바선생과 생명을 건(듯한 위기감이 드는)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한 마리의 바선생이 밝은 아파트 복도에 서 있다가 불이 꺼진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고, 그 이후부터 현관과 가까운 쪽에는 24시간 불을 켜놓고 살고 있다. 방충망이 없는 말레이시아의 창문은 늘 닫아두는 것을 철칙으로 하면서도, 그래도 혹시 몰라 바 선생이 싫어한다는 레몬 껍질을 창문에 널어놓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인생에서 굳이 써보지 않아도 됐을 다양한 독성물질을 구비하고 실험하여 기록을 남긴 후 필요한 이들에게 정보를 남기고 있었다. 딱한 사연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화장실에서 바선생을 만난 뒤 머리가 떡질때까지 머리를 감지 못하고 울며 지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 더보기 15. 선셋헌터 A greedy person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건 여섯 시 전후. 그것을 보러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 시내 쪽 도로는 오후 네 시 반부터 슬슬 막히기 시작한다. 다섯 시 반부터는 절정이다. 탄중아루 해변 앞 좁은 도로는 주차장이 된다. 나는 거의 매일 그 길 위에 있었고, 내가 탄 택시의 기사님이 아주 노련하게 우회로를 아는 사람이기를, 좀 더 일찍 도착해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를 손 모아 바랐다. 해변으로 향하는 길에 택시 앞유리 너머로 하늘이 조금씩 물들어가는 게 보이면, 나는 마치 한 번도 석양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마음이 조급해지고 빨리 가서 몇 분이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으로 마음이 그득그득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보는 석양이 매일 같이 다른 모습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다. .. 더보기 14. 고양이와 비둘기와 개와 개미들 The lives of others 개미들이 내 화장품을 탐낸다고 생각했다. 이쪽에 가져다 두면 이쪽으로 오고, 저쪽에 가져다 두면 저쪽으로 가는 게 아주 성가셨다, 에잇.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게 개미들의 하루 일과인가보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순찰하듯 한 번씩 도는 건지도. 음. 자리를 옮겨 놓으면 또 새로운 로션 탑 같은 게 생긴 것이니 구경하러 오는 것.... 처음엔 내 물건에 뭐 달콤한 것이라도 묻었나 싶어 닦아보기도 했지만, 그저 구경하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을 하지 않길래 어느 순간부턴 그냥 놔두고 있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는 거다. 이 집엔 무지무지 작은 개미들이 종일 바삐 돌아다닌다. 약간 투명한 몸은 바스러질 듯 연약한데, 성실하기는 어찌나 성실한지 그냥 가만히 앉아 쉬는 놈을 못 봤다. 손톱만 하다고 하기에는 손톱보.. 더보기 13. 공감과 오만사이 Unnamed road "제발, 제발 나한테 보여주지 마세요." 내가 자주 사람들에게 하는 말, 신에게 하는 호소. 나는 누군가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어 고통받는 병에 걸렸고 그것이 어떻게 낫는 병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더 이상 무엇도 보거나 느낄 힘이 없어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산다. 뉴스를 보지 않는다. 누군가 전해주는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 애쓴다. 무언가를 마음 아파하며 나에게도 전할라치면 "나한테 말하지 마, 나한테 말하지 마…." 손사래를 친다. 제발 부탁이야. 누군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나한테 말하지 마. 나는… 나는 아무런 힘이 없어. 고통과 가까운 곳이었던 내 일터에선 수시로 감정의 버튼을 꺼 놓아야만 일할 수 있는 날이 많았다. 그 버튼은 금방 고장이 났다. 나는 '나약하게도' 너무 자주 마음이 아팠다... 더보기 12. 손님 맞이 no sexy-pose 밤새 비가 내린 덕에 아주 곤하게 잤다. 비 올 때의 기압이 내 몸에 잘 맞나보다. 아, 밤에도 짖는 개 깡패 무리가 비 오는 날이라 그런지 조용하기도 했고. 빨래며 청소를 마치고 창가를 향해 둔 의자에 앉았다. 오후 4시. 비가 점점 더 거세게 내린다. 나는 턱을 떨구고 창밖을 보면서 '이보다 더 내릴 수 있나?'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보다 더' 내린다. 맑은 날엔 겹겹이 보였던 산 뒤의 산들도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고, 딱 눈앞에 있는 산과 송전탑, 빨간 지붕 몇 개만 유난히 또렷하다. 그것들도 금세 아른아른 흐릿해진다. 우와, 동남아의 우기란 이런 것이구나. 아까 비가 좀 덜 올 때 먹을 걸 사둬서 다행이다. 열흘만의 대청소였다. 그동안 깨작대며 머리카락이나 줍고 먼지 좀 닦는 시늉을 했다면 ..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