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들이 내 화장품을 탐낸다고 생각했다. 이쪽에 가져다 두면 이쪽으로 오고, 저쪽에 가져다 두면 저쪽으로 가는 게 아주 성가셨다, 에잇.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게 개미들의 하루 일과인가보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순찰하듯 한 번씩 도는 건지도. 음. 자리를 옮겨 놓으면 또 새로운 로션 탑 같은 게 생긴 것이니 구경하러 오는 것.... 처음엔 내 물건에 뭐 달콤한 것이라도 묻었나 싶어 닦아보기도 했지만, 그저 구경하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을 하지 않길래 어느 순간부턴 그냥 놔두고 있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는 거다.
이 집엔 무지무지 작은 개미들이 종일 바삐 돌아다닌다. 약간 투명한 몸은 바스러질 듯 연약한데, 성실하기는 어찌나 성실한지 그냥 가만히 앉아 쉬는 놈을 못 봤다. 손톱만 하다고 하기에는 손톱보다도 작고, 손톱 옆에 일어나는 거스러미보다 작다. 이들은 내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나 오렌지 조각 같은 것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집으로 가지고 가는데, 오렌지 조각이 말이 오렌지 조각이지 과육에 붙은 아주 자그마하고 동그란 알맹이다. 그 작은 걸 개미 두 마리가 붙어 영차영차 가지고 가는 장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아니, 저 작은 걸 둘이서 들어야 한단 말이야? 저걸 가져가면 둘이서 나눠 먹는 거야? 오마나~' 가끔은 개척자 개미 한 마리가 무리도 없는 테이블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찾다가, 결국 찾아내 영차영차 가지고 가는 걸 보면 감동이 일기까지 했다. '멋져. 외로웠을 텐데. 킁. 내가 뭘 흘린 거지?' 나는 우리 집의 이 개미들한테 왠지 모를 정까지 들어, 바닥에 누워 스트레칭 할 때면 개미들이 바쁜 시간은 아닌가 확인까지 해 가며 몸을 누이곤 한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사는 코타키나발루의 12월. 콜롬봉(이 지역 이름)의 깡패 개들과 그들을 지붕 위에서 감시하는 닭들도 하루가 바쁘다. 마르고 근육질인 데다가 털이 갈색 또는 검은색인 개들이 너 댓씩 몰려다니며 우왕 우왕 짖고, 가끔은 싸움을 하는 것도 같은데 그게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는 나도 모른다. 사실 그들 각각의 성격도 모르면서도, 겉보기에 포스가 있어 보여 내 마음대로 '깡패 개들'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다. 내가 집 근처 중국 식당에 다녀올 때 그중 두 마리가 나에게 다가오며 짖길래 무척 쫄았던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들도 우리 집 개미처럼 그냥 순찰을 하는 것일지도. 말레이시아는 고양이가 사랑을 받고 개는 부정한 동물로 여겨져 만지지도 않는단다. 그러고 보니 그 개들이 왜 그렇게 말랐는지 알 것 같다. 안타깝… 아, 마음대로 추측하지 말자, 엄청난 헬스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식당 사장이 키우는 손바닥 두 개만 한 강아지는 무척 사랑을 받는 듯 토실토실하던데….
콜롬봉의 개와 닭들이 매일 쫓고 쫓기는 영화 같은 생을 산다면, 낭만적인 걸로 가장 영화 같은 삶을 사는 건 제셀톤 포인트의 선셋 고양이다. 이 선셋 고양이가 내가 본 중 가장 낭만적인 12월을 살고 있다. 역시 '선셋 고양이'라는 이름도 내가 마음대로 지었다. 후후, 인간이란…. 제셀톤 포인트는 사람들이 물놀이 하러 갈 때 꼭 들르는 항구인데, 저녁땐 한산하니 지는 석양만 이곳저곳 붉은빛을 묻혀 놓는다. 가끔 탄중아루 해변까지 가기에는 시간도 늦고, 차도 밀릴 것 같으면 중간 지점인 제셀톤포인트를 찾았다. 그때마다 이 선셋 고양이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항구의 갑판에 누워서 지는 해를 온 몸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거기 모인 몇몇 사람들도 이 애를 무척 귀여워해 주는 것 같았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이 고양이는 꼬질꼬질해진 두 발을 포개고 거기에 얼굴을 묻고서 석양을 구경했다. 종일 어디서 뭘 했을까? 낮에는 어디 가서 무얼 얻어먹으려나? 발마다 하얀 양말을 신고선 양말이 꼬질해질 때까지 어디를 다녔을까? 궁금해하는 건 내 사정이고, 나른하게 누워 석양을 보는 그 녀석을 보고 있자면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는 건, 내가 아니라 그 고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 식료품 마트에선 둘이 꼭 붙어있는 한 쌍의 비둘기를 만났었다. 아무래도 이쪽은 낭만보다는 현실인 것 같았다. 두 마리의 비둘기가 쇼핑카트들이 줄지어 서 있는 주차장 한 쪽을 차지하고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둘이 서 있던 곳은 차가 한 대 들어올 수 있는 네모난 주차 칸의 중앙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택시를 기다리는 것 같아 보여 웃음이 났다. "택시 기다리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물으면서 물건을 사러 들어갔다가, 양손을 무겁게 하고 나올 때까지 그네들은 거기에 서 있었다. 나는 그랩 택시를 불렀는데, 아무래도 이들은 그 앱을 깔지 않은 듯했다. 그들이 기다리는 택시는 안 올 것이다. 도시 외곽인지라 택시가 안 다닌다구….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집이 사실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상상하면 조금 재밌다. 물론 나를 혼자 두지 않는 게 바선생이면 갑자기 무서워지지만…? 내가 소파에 늘어져 TV를 보는 동안이 개미들에게는 부엌을 순찰할 최고의 기회일 것이고, 빨간 지붕 위의 닭들이 내가 중국 식당에 오가는 걸 누구보다 유심히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참 재미있는 일이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바삐 살고 있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할 일이 다르고, 마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를 것이다. 우리 집 개미들은 나를 뭐라고 부를까? 부스러기도 안 나오는 구두쇠? 콜롬봉의 개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한국인처럼 입고 다니는 쫄보? 선셋 고양이는 나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아 보였고, 비둘기 커플은 내가 택시를 먼저 잡고 가는 게 분했을지도 모른다. 이 12월의 따뜻한 겨울, 코타키나발루는 복작대고, 분주하고, 바쁘다. 여러 삶으로 가-득 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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