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어수선/코타키나발루 유배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11. 골든레코드 A tear button 눈물 버튼을 찾았다. 골든레코드. 그게 내 눈물 버튼이다. 보이저호에 달아서 우주로 보냈다는 이 레코드는 진작에 나만의 '믿을 수 없는 일'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지만, 눈물 버튼은 그 레코드를 재생해야 눌리는 것이었다. 혼자서 빨래를 너는 중이었다. 유튜브를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소리만 들었다. 수건을, 팬티를, 티셔츠를 널다가 다시 수건을 널 때쯤이었다. 파도 소리. 눈물 버튼은 인간들이 지구를 소개하며 담아 둔 파도 소리가 나올 때 눌렸다. 나는 내가 건조대라도 된 듯이 수건을 허공에 든 채 흐아아, 얼굴을 구겼다. 갑자기 울컥하는 눈물에 당황한 내 귀로 새 소리와 바람 소리, 천둥이 내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베란다 밖으로는 부드러운 부슬비가 소리도 없이 허공을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빨랫감들과 .. 더보기 10. 할 일 없는 하루하루 I'm Ku Jun-pyo 딱 한 개의 해야 할 일, 예를 들면 '은행 다녀오기' 같은 것- 그거 하나 해내는 게 쉽지 않은 날들이었다. 끝내주는 계획이나 꽉 찬 다이어리 같은 걸 포기한 지도 오래다. 인생이 그냥 쏟아져버린 물 같다. 주워 담으려 해봐야 나만 피곤하니 증발하게 두자! 그러니 성취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낙이었던 내 작은 수첩 안엔 그날 먹은 것들과 똥은 눴는지 여부와 끊어질 것 같은 어깨와 부러질 것 같은 목 상태가 어떤지만 적었다. 나는 그걸로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오늘이 어제가 아니라는 것을 구분하며 휴직 후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답도 없고 정리도 되지 않는 나날들. 가능하면 몸 아픈 것이라도 팔아서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도시에서의 무거운 날들.. 더보기 9. 악몽 You are my nightmare 눈 뜨자마자 보이는 깨끗한 얼굴의 하늘.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꿈벅댄다. 아, 여기 말레이시아지. 서울의 내 방이 아닌 풍경에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빨리 깨닫는다. 꿈이었다. 오늘은 꿈 속의 언젠가와 다른 날, 여기는 꿈 속의 어딘가와는 다른 장소다. 어제는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저렇게 말갛다. 아마 저 날씨가 오후까지 간다면 오늘 석양도 정말 끝내줄 것 같다. 생각해보니 꿈은 끔찍했어도 잠은 깨지 않고 잤다. 서울에선 이런 꿈을 꾸면 꼭 새벽 세시나 네시에 눈을 떴다. 다시 잠들 수 없는 밤만 남은 새벽은 무척 우울한 것. 자리덧 심한 내가 이곳에 이사 온 뒤로 아직 잠을 설친적이 없다는게 신기하기만 하다.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미적미적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창 밖으로 뽀얀 안개가 우거진 .. 더보기 8. 바선생 2 Mr.Bah II 새로 이사 온 숙소는 시내로부터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우뚝 선 아파트. 이 아파트는 시야를 가리는 어떤 것도 없이 전망이 좋고, 남향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쭉 해가 든다. 석양 보러 여기에 온 나에게는 매일의 날씨와 해변의 구름을 살피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그러나 일단 동남아의 숙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선생의 존재. 지난 숙소에서 호되게 당한 나는 나를 마중 나와 준 호스트에게 첫 만남부터 바선생의 존재를 물었고, 그들이 있다면 제발 살충제의 위치와 사용법, 주요 출몰 장소를 알려달라 애원했다. 여느 여행객이 물을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근처의 맛집과 가는 방법, 석양 보기 좋은 곳 같은 걸 물어보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내 몸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 더보기 7. 편지 to 1999 얘, 해준아. 여기는 2019년 12월 10일이야. 너는 한 달쯤 지나면 서른두 살이 돼. 서른둘이라니! 그런 날이 오기는 온다, 정말로. 뜬금없지만 오늘에야 1999년의 너에게 편지를 보내. 왜냐하면 얼마 전에 내가 네가 쓴 편지를 받았거든. '2019년의 나의 하루.' 그게 네 일기장에 누렇게 바래서 붙어 있더라. 그 종이, 20년이 지나니까 정말 색이 바랬어. 20년! 나는 네 20년 뒤야. 2020년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와 보니, 우리가 과학 포스터에 줄차게 그렸던 '하늘을 나는 자동차' 같은 건 갑자기 등장할 것 같지 않아. 참 다행이지. 정말 우리 상상 대로라면 지구는 애초에 아작이 났을 거야. 아흐, 보통의 아이들도 다 그랬겠지만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매번 있었던 거-그게 참 괴로운 .. 더보기 6. 끈 떨어진 연 How I burned out "왜 어떤 사람들은?" 이게 나를 따라다닌 질문이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을 겪어야 해?" 나는 아마도 스스로 초래하지 않은 고통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이 개인들의 노력을 쉽게 입에 올리고 인과응보를 얘기해도, 사실 그렇지 않은 일이 대다수였으니까. 나는 어찌어찌 간 대학에서 그런 것을 배웠다. 보이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 개인의 삶을 얼마만큼 조져놓을 수 있는지. 나는 그런 것에 눈이 갔다. 인간이라는 종에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고,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나는 저 질문이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도 모른 채 졸업 후 오랜 시간을 한 분야에 몸담았다. 한순간에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들을 일.. 더보기 5. 바선생 Mr. Bah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중순. 카페 안에는 오전 11시의 햇빛이 구름 사이로 간간히 비춰오고, 그때마다 찻잔 속 투명한 찻물이 반짝인다. 잔잔하고 훈훈한 재즈풍의 캐롤이 흐르고 있다. 여름의 12월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나는 방금 코타키나발루의 한 에어비앤비 아파트에서 체크아웃을 했고, 건물 1층의 카페에 앉아 바선생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언제부터 바선생을 무서워했나? 따끈한 실론티 한 잔을 호로록대며 목 뒤로 넘겨본다. 부드럽다. 지난 3일간의 내 모습을 돌이켜보니 어이가 없어 '후후' 웃음이 난다. 뭐, 이것도 그 집에서 나온 자의 여유이지 하루라도 거기에 더 머물라고 하면 나는 다시 아까, 그리고 어젯밤, 그제 밤의 얼굴 -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니고 눈가에 가까운 광대 위쪽이 살짝 들.. 더보기 4. 석양을 기다리는 마음 Sunset '매일 석양을 보리라.' 계획이라고는 그것 하나였다. 그러고 싶었다. 지는 해가 아름답기로 손에 꼽는다는 탄중아루의 해변을 생각하면, 본 적도 없는 그 바다의 석양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매일 울고 싶었다. 지는 해를 보면서 매일 울어버리리라 다짐했다. 첫날 부터 해변을 찾았다. 네 시부터 해변을 거닐며 여섯 시 넘어 지는 해를 기다렸다. 아직 하얀 햇빛이 시원한 해변에는 파도만 바삐 오가고 있었다. 얕은 파도가 해변 깊게까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니, 모랫바닥이 거울이 되었다. 조금 있으면 많은 사람들의 '인생샷' 근원지가 될 곳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한적하고 미지근한 말레이시아의 바닷물에 발을 좀 담그고, 풀밭 가까이 돗자리를 폈다. 근처에 있던 개미들이 파티 장소를 찾는 중이었는지 돗자..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