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어떠세요?
-음…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기분이요.
-이번 주엔 어떻게 지내셨는데요?
-그냥 뭐가 너무 많고… 이제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학원도 끊어놓은 게 있고, 숙제도 해야 되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데… 아무것도 못 하고 지나가 버렸어요.
-그럼 하고 싶은 대로 잘 지내셨네요?
-? … ?! 이게 지난 4월 내가 정신과 의사와 나눈 얘기. 어딘지 바보 같은 대화였는데, 나만 몰랐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안 하고 싶은 대로 안 하고 있었던 것! '내 맘대로 산다'는 인간 최대의 행복 앞에서 그것을 찾아 헤매는 일주일을 보낸 것이다. 마치 피라미드 벽에 기대 흘청흘청 그것을 훑고 걸어가면서 "어떡해… 난 영원히 피라미드를 못 찾을 인생인가 봐."한 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이 있다. 아니, 있기만 하냐. 그런 날이 많은데, 아니, 대부분인데, 그런 날에 '진짜' 아무것도 안 한 적은… 솔직히 많았으나 실상 별로 없다. 그런 날은 대부분 '뭔가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만으로 시간을 자꾸 '때우고' 마니까. 그러고 마니까. 그건 마치 불안한 마음으로 시계를 초조하게 살피며 개그콘서트를 보다가 자우지장지지지(가아닐 게 분명한) 엔딩 곡이 나오면 더 불안해져 버리는 일요일 밤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실제로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지하게 불안하다.
지금 밖에선 늦은 장마에 하늘이 운다. 쿠궁-쿠궁-하며 천둥이 땅까지 울린다. 나는 호우 경보와 천둥, 쏟아지는 빗속에 숨어 있다. 이런 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구실이 생겼다는 기분이 돼서. 방금은 '내가 만약에~ 성우 학원을~ 그렇~게 다녀놓고도 성우가 안 되잖아? 그러면~ 엔지니어를 하지 뭐~!'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긴 한데 뭘 해도 못 할 것 없다는 느낌의 '뽕 맞은 백수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긍정이다. (나는 지금 밀린 숙제를 안 하고 있는 중이다.) 아, 이렇게 날이 궂은날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비가 오고 천둥이 치니까 세상도 멈춰 있을 것만 같아. 나는 숨는다. 나는 곧 엔지니어링을 배우러 다니게 되겠지. 응.
괜히 넓지도 않은 방을 몇 걸음 서성대며 <비밀기지 만들기>를 펴서 후루룩 뒤진다. 우리 집엔 책이 없다. 이케아 철제 책장 한 칸, 아니 두 칸 정도가 전부다. 그 많던 책들은 다 어디로 갔나? 중고로 팔았다. 갖다 버렸다. 버린 것들은 이런 것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인권, 문화와 제국주의… 그리고 남은 것들은 이런 것이다. 비밀기지 만들기, 폭풍 마왕과 이반 왕자, 나야 뭉치 도깨비야, 지지고 볶고, 지구의 속삭임 등등…. 그중에 <비밀기지>를 꺼내든 건 책 읽을 생각이 없단 뜻이다. 어차피 이 책도 정독하라고 만든 책이 아닌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그냥 왼손으로 책을 잡고 오른손으로 후루룩, 빠르게 넘긴다. 얼굴에 부채라도 부치듯이. 그 사이 책장이 내는 바람을 타고 단어들이 삐져나온다. '비밀기지, 틈새' 같은 것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방의 틈새, 건물의 틈새, 자연의 틈새, 공터와 폐허의 틈새, 도시의 틈새. 책의 왼쪽 상단마다 큰 글씨로 쓰인 여럿의 틈새가 쏟아져 나오니 내가 숨을 곳도 생긴다. 나는 여러 번 더 책에서 바람을 일으킨 다음, 덮는다. 그래, 다 읽었다. 교훈을 얻었다! '숨을 곳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저 천둥이 만든 틈새 같은 것들. 이 책이 만든 틈새 같은 것들에.
오늘 나는 불안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멍-하니 앉아만 있는 내가 불안했다. 몰입할 에너지가 없는 것 같은 내가 불안했다. 몰입, 그러니까 집중, 집중은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말하고, 내가 원하는 긴장감은 성취를 만들어 낸다. 성취에 대한 불안. 때로는 '몰입 그 자체로 성취로 여겨지는 어떤 상태'에 오래 머물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 하루에 그런 시간이 조금이라도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한 것이고 그 아무것도 못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감각. 단순하지만 무지막지하게 무시무시하고 막돼먹은 이 불안을 끌어안고 뒹구는 게… '어디 나 혼자만이겠냐!' 괜찮은 척 저녁 분 안정제를 삼킨다. 그런데 이 불안은 정말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전 세계를 빙글빙글 돌아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보듯이 어떻게든 나를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인가. 나는 요즘 열심히 틈새를 만들려 애쓰며 살고 있는데… 실업을 했는데… 청약을 넣었는데(당연히 서울 밖으로)… 몇 없는 책의 틈새를 벌려 가장 느린 페이지를 펼쳐 놓기도 하는데…. 언제든 뛰어 들어가 숨을 수 있는 책장 틈새가 눈앞에 있어도 어느 날의 어떤 불안은 내 눈을 완전히 가릴 만큼 힘이 세다. 아까 내가 취해있던 백수 뽕기氣는 그래봤자 뽕이기 때문에 오락가락한다. 결국, 나는 내 안에 자주 불어오는이 불안이 앞으로 더 커질지 작아질지, 나를 삼키고 말지, 아니면 내가 그걸 머리부터 밟아 누를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영화를 봤다. 시간을 때우려 초조하게 본 그 영화에서 그랬다. 구덩이에 빠지면, 그 구덩이를 더 파지 말고 그냥 빨리 나오라고. 나는 그 문장을 그다지 감명 깊게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이 글을 쓰면서야 깨닫는다. 내가… '틈새'를 찾고 있다는 걸. 그래, 나는 틈새를 찾고 있다, 구덩이를 빠져나갈 방법이 아니라, 틈새… 틈새라니! 난 드디어 산 사람이 된 것이다. 아마 이것이 정신과 의사가 이제 나를 2주에 한 번 오게 한 이유일 것이다. 아, 명의네, 짜식. 몇 년이더라, 지옥 같던 내 20대. 1년, 2년, 3년… 6년. 시간의 구덩이라는 건 그렇게 깊지 않았구나. 지금 보니, 그것은 그냥 후욱 빠져버리는 틈새였던 것이다. 난 그게 무저갱이라고 슬퍼했는데. 빠진 채로 나올 수 없다고 절망했는데. 아무튼간에 그렇게 힘들었던 게 억울할 만큼 그 시간은 그저 틈새였고, 누구지, 저, 스티븐 호킹이나 그, 칼 세이건 같은 사람이 잘 설명할 텐데, 나는 그 틈새에 빠진 다음 긴 홀을 통해 후욱-지금으로 온 것이다. 웃음이 난다. 긴 홀을 타고 지금으로. 시간의 틈새에 빠져서. 후후.
그러니, 인생은. 얼마냐. 재미가. 있는. 것이냐! 라고, 펜을 휘두르는 몰입에 취해 나는 글을 맺어본다.
글이 맺힌다.
아, 이제 어디로 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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