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통제력을 잃은 건 언제였나. 자살을 하겠다고 자명종이 달린 탁상시계를 깬 뒤 그 유리조각에 손등을 그어보았을 때? 시험삼아 살짝 베어 본 손등의 피부가 너무나 예리하게 갈라진 뒤, 그 직선의 틈 사이로 놀랍도록 빨간 피가 서서히 쏟아져 나오는 걸 봤을 때? 아니다, 난 그때 정신을 차렸다. 놀라서 미칠만큼 울었을지언정 죽을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내 죽음으로 갚을만한 것, 대신할 만한 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난 그날 불완전한 나라도 계속해서 나이기로 다짐했다. 2006년
그러면 언제였을까? 날 잠도 재우지 않고 학대하던 전남편에게 차라리 나를 때리라며 내가 내 자신을 때리고 또 때렸을때? 아니… 그날도 아니다. 나는 또렷하게 아팠다. 뺨은 부었고, 허벅지에는 피멍이 들었다. 난 그 때 통제력을 잃은 게 아니라 살고 싶다고 온 몸으로 말한 것이었다. 나 자신에게 "이곳을 벗어나자"라고 죽어라 외친것이었다. 다행히도 난 그 외침을 들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식으로 외쳐야 할 상황에 나를 두지 않기로 다짐했다. 혹여 그런 상황이 생기더라도 그때는 상대를 아프게 하리라, 상대에게 외치리라 다짐했다. "난 여길 벗어날거야! 붙잡으면 죽일거야!" 내 피멍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사과는 이제와서 말하건대 내겐 조금도 필요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가 사과할 때 내 몸은 그와 함께 있었고 그는 나와 화해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이미 그로부터 아주 멀리 도망쳐 있었다. 2015년
그래, 생각났다. 내가 처음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은 차 안이었다. 별거를 시작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찾아온 그가 갑자기 차를 몰아 집에서 먼 곳으로, 점점 더 멀어지다 김포 공항까지 갔던 날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차는 나를 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달렸다.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달렸고, 슬리퍼 차림의, 집 앞에 나올 때 차림의 내가 어딘가에 내려봤자 울며 택시를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아니 그럴 택시 조차 없는 곳으로 달렸다. 결국 그 차가 어디인지 모를 도로 가에 섰을 때, 나는 차 밖으로 나가는 대신 내 밖으로 나갔다. 반쯤, 그리고 아주 완전히 나가는 걸 반복했다. 방언을 하듯 알 수 없는 말이 반복해서 나왔고, 몸을 떨었고 땀을 흘렸다. 숨이 가빴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법적으로 그의 아내였던 미친 여자를 옆에 태운 남편은 핸들을 돌려 돌아가는 차안에서, 계속해서 표지판을 읽고 외치고 소리 지르며 숨쉬지 못하는 아내를 보았다. 그는 뭘 느꼈을까? 장담컨대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무언가 느꼈다면 나를 놓아주었을 것이다. 여전히 그에게 붙잡힌 채 나는 땀에 흠뻑 젖어 맨발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새까매진 더러운 발로 침대 속에 들어가니 그제야 내가 내 속으로 들어왔고, 그건 당연히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았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고 살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나를 버리는 수 밖에 없었다는 걸,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17년
"누워, 누워. 오늘 학원은 가지 마. 안 되겠다."
엄마가 이불을 폈다. 머리도 감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했는데 체기가 가시질 않았다. 점심으로 파전을 잘 먹고, 좋은 공기 가득한 산에도 잘 다녀와놓고, 내려오는 길에 멀미가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학원에 못 갔다. 대신 매실액을 탄 물을 한 잔 마시고 누워서 잠을 자야했다. 자는 내내 더웠다 추웠다 하는 바람에 겨울 이불을 덮었다 걷어 찼다 했다. 일어나서는 아무 맛도 없는 찹쌀로 쑨 흰 죽을 먹었다. 서러운 일이었다. 감기로 한 달이나 쉰 학원을 오늘에야 다시 가려고 했는데, 재등록을 또 미뤄야 한다는 게. 또 머리도 감고 샤워도 했는데 두꺼운 겨울 이불을 덮고 누워야 한다는 게…. 이불 밖의 여름이 날 기다리는 것만 같았는데… 그랬는데…. 난 이 무력감이 끔찍하게 싫다.
아플 때의 무력감은 삶의 주도권을 빼앗길 때의 그것과 같다. 나는 영원한 나의 안전일 엄마의 손길 아래서, 포근한 이불 밑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나가야 할 세상이 바로 몇 발자국 앞에 있는데 나는 여기 누워있어야만 한다. 난 이 무력감과 싸워 이기고 싶은 분노를 느낀다. 내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오고싶다. 내 삶은 내가 통제 할 것이다. 힘이 빠질대로 빠져 누운 나는, 머릿속에서 쥐어짜듯 큰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마치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싸움인 것처럼.
-나는 무엇을 주도하고 싶은가?
나는 자신있게 대답한다.
-거치는 것 없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고, 거칠 것 없이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때 먹고,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나는 다시 묻는다.
-주도권을 잡는다는 건 무엇인가? 주도권을 잡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내가 망설인다.
-육체를 쳐서 관리하고 단련하여 질병이 침투할 수 없도록 하는 모습? 지나간 기억들을 무시하는 것? 지금의 아픔들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다고 끊어내는 것? 몸이 아프지 않은 것? …아니, 아니… 나에게 그건 술에 취한 사람….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 자기를 넘겨 버린 뒤 주도권을 얻는다. 사회적 눈치같은 건 볼 필요도 없이, 자기 중심이 극에 달해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부끄럽게도, 그렇다면 나는 주도권을 잡고 있다. 고통에 취해 아직도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같은 말을 쓰고 또 쓰니까. 같지만 같을 수 없는 말들을 쓰고 또 쓰니까. 그것들을 아주 간단한 몇 마디 단어, 말하자면 '이혼' '죽음' '부친상'같은 것으로 요약해버리고 쿨한 척 하면서도 여전히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나는… 그런데 나는 궁금해진다. 나는 애초에 누구와 이 싸움을 하고 있는가? 도대체 누가 내 주도권을 빼앗아 갔단 말인가? 질병이? 아니면 이런 증상이 쉽게 나타나도록 내게 상흔을 남긴 그 모든 일들이? 나는 무엇과 싸우겠다고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가?
2017년의 언젠가 내가 완전히 미쳤었던 그 때의 느낌은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지금에도 가시처럼 박혀있는 그 순간을 몸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만 비슷한 느낌, 그러니까 무언가 '할 수 없는 상황',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일거리나 컴퓨터 화면',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 같은 것 앞에서 찔린 사람처럼 움찔하고 쿵쾅대며 도망 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여차하면,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몸은 회복할 줄을 몰랐고 나는 좀 더 자주 아프고, 자주 앓아 눕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몇 년이 지나도록 내게 어떠한 작은 사과조차 건네지 않았다. 이 세상이 불완전한만큼 아름답고, 불완전하지만 질서가 있고 정의 또한 있다는 사실을 알릴 어떤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몇 년 간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나를 스스로 보호해왔던 지난 시간이, 더는 왜냐고 묻지 않기로 한 나의 영리함이, 내가 가시에 찔려 움찔댈 때도 질서와 순서와 소리 없음으로 살아있었던 뒷산의 나무들과 내 베란다의 식물들과 점점 길어가는 머리, 수 없이 잘라내야했던 손톱, 때마다의 배고픔, 그때 마다의 식사, 몇 번 지나간 장마와 다시 뜨는 하얀 구름, 그런 것들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게 세상의 일부라면 그래, 사과로서 어느정도는 됐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레 깨닫는다. '아무 것도 내게 침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싸울 것이 없다. 나는 통제권을 뺏기지 않는다. 주도권, 그것은 언제나 내 것이었고 내 편에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나를 살리려 애쓴 것.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방법 중에 나를 버리는 것이, 죽음에 가까운 것이 있었을지라도 그건 나를 살리려 애쓴 나다. 주도권을 '빼앗길 것 같은 느낌'까지도 내 것이다. 나는 빼앗기지 않으려, 빼앗길 것 같은 느낌과 싸우지만 그건 느낌일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느낌이 정말 사실인 날이 온다면, 나는 아주 능숙하게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번 연습했으니까. 아주 여러 번 연습해봤으니까.
어쩌면 몸은 이렇게도 오래 아픔을 가지고 있는걸까. 가끔은 그게, 마치 몸에게 아주 소중하고 신성한 일처럼 느껴질만큼, 몸은 자신이 겪은 아픔과 충격을 아주 오래 품어 다룬다. 영혼과 정신을 가졌지만 육체를 동시에 가진 존재로서의 나에게 그건 아주 괴로운 일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이 한계는 내게 아주 괴로운 것을 더하게 할 수도, 아니면 그 괴로움을 고요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오늘 나는,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것은 그 고요라는 생각이 든다. 더는 무엇과도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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