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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어수선

이불

이미지 출처 www.arpeggiobasic.com

 

  요새 어떤 이불 덮어? 덥잖아. 뭐, 아직 밤엔 선선하긴 한데 이제 진짜 더워지잖아. 오늘은 35도 넘었고. 으, 6월인데. 그냥~ 궁금해서. 흐흐. 응, 나도 좀 웃긴다고 생각은 해. 남의 집에 어떤 이불 있나, 뭐 덮나 물어보는 거, 좀 웃기네. 생각해봐, 남의 집에 가서 냉장고 열어보는 것보다, 이불장 확 열어보는 게 더 예의 아닌 거 같아, 그치. 진짜 다 들키는 느낌이잖아. …아닌가? 요샌 다 침대 쓰니까 다 보이나? 다들… 색깔 맞춰서 매트에, 덮는 이불에, 베개까지 맞춰서 써? 우리 집만 이불장 열면 난리도 아닌가? 우리 집? 아… 그냥 역사의 현장 같아. 이불은, 잘 버리지도 않잖아.

 

  아니, 나 이불 샀거든, 여름 이불. 난 아무리 더워도 이불은 꼭 덮어야 되는 사람이라 누비이불로 했어! 그냥 홑이불도 있었는데, 그건 덮은 거 같지도 않고 그 뭔가… 감싸지는 느낌이 없으니까? 아이 그러려면 이불을 왜 사~ 지난번에 비행기에서 추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산 담요나 덮고 살지. 이거 봐, 이거야. 이걸로 샀어. 하, 이게 네이버 메인에 딱 뜬 순간! '와, 이거 덮으면 여름에 너무 행복하겠다' 싶었어. 이 무늬 좀 봐. 너무 행복하지. 내일 온대. 난 내일부터 여름 끝까지 하와이에 있는 것 같을 거야.

 

  내 방에 침대 없어~ 매트 위에 깔고 잘 거야. 엄마는 여름 이불 벌써 장만하셨고~ 동생이 엄마랑 나 같이 덮으라고 퀸사이즈로 이불 보내줬는데, 와, 난 이런 재질 처음이야.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고, 차가워! 이불이 차가워! 너무 차가워서 난 그거 덮고 자고 일어나서 기침을 해댔다니까? 난 몸이 차서 그거 못 덮어. 그러니까, 난. 내 이불이 필요하지. 흐흐. 다행히 우리 엄만 그게 잘 맞나봐. 올여름은 걱정 없어. 그 이불, 열대야 같은 것도 한방에 이길걸? 아우, 생각만 해도 추워.

 

  너, 이불 사본 적 있어? 난 이불 사본 거 처음이야. 이 이불 사이트를 들락-날락, 겨우 3만 원짜리 그거에 하루에 열 번도 더 고민, 또 고민…. 그냥 집에 있는 거, 옷장 겸 이불장 열면 있는 닳고 닳은, 파랗고 회색이고 갈색이고 한 것들 중에 얇은 거, 아님 노란 거 솜 빼서 여름 이불이랍시고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엄청나게 고민했어. 웃기지? 나 백수잖아. 3만 원이 어디 그냥 나오냐~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나이 서른둘 먹도록 이불 한 번을 사본 적이 없는 거야. 동생은 대학 때부터 제 싱글침대에 색 맞는 세트들 사들여서 꾸몄는데, 난 아니었어. 심지어 그때 내가 뭘 덮고 살았었는지 기억도 안 나. 진짜 하나도. 그러고 나서… 결혼을 하고도, 결혼을 했는데, 결혼할 때도 이불을 안 샀어. 우리 집이 그때 언제나 그랬듯 사정이 어려워서 이불을 못 했거든. 사실 살 필요도 없었어. 그 사람 살던 집에 들어간 거잖아. 그 집은 모든 게 완성되어있고, 정해져 있고, 구비되어있고, 가족들끼리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규칙도 있고… 나는 뭐 하나 버릴 때도 허락받아야 하는…. 난, 난 차라리 내가 새 이불인 것처럼, 가구처럼 그 집에 들어갔었지. 그리고, 기억이 안 나. 그 짧고도 묘했던 이상한 결혼 생활 중에, 아니, 그 사람 가족들과의 공동생활 중에 내가 뭘 덮고 살았었는지.

 

  나 잠옷은 되게 좋아해. 잠옷 자꾸 사서, 동생이 "언니 제발 그 돈으로 밖에 나가 입을 옷을 사"라고 할 정도로. 에이, 그래봤자 한 벌, 두 벌… 세 벌, 세 벌. 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니까…. 난 잠옷이 무지 많아서 기분대로 입고 자면서 살고 싶어. 나는 자는 게 제일 좋아. 하루 중에 자는 시간이 제일 좋아. 근데, 난 왜 이불엔 통 관심이 없었을까? 등이 배겨서 8만 원 들여 푹신하고 파란 매트 하나는 샀을지언정, 그 위에 얹을 이불 같은 건 왜 생각도 못 했을까? 모르겠어. 매일 밤에 잠이 안 와서 괴로우면서도 잠자리는 임시의 것…. 매트를 펴고, 또 아침이 되면 접어버릴 그런 것으로 여겼지. 그건 침대 아니야. 만약에 그게 침대였다면, 내가 조금씩 모든 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절을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잠옷을 샀듯이 이불을 샀을 거야. 나만을 위한 이불. 오직, 나만을 위한 이불.

 

  여전히 밤새 두 번은 잠에서 깨. 요즘은 한 시 반, 네 시. 약을 먹으니까 누우면 잠은 잘 오는데, 자꾸 깨는 거야. 한참 이게 너무 괴로울 땐 잠을 지속시켜주는 약을 처방받아 먹었는데, 아침 9시에 겨우 퉁퉁 부은 눈을 떠서 사다리 모양 선반을 붙잡고 일어나야만 했지. 그게 싫어서 약을 바꾸고 나니까, 나는 다시 밤새 두 번을 깨. 근데, 근데 있잖아. 새 이불이 오면… 밤에 두 번 깨도, 아니 세 번 깨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내 이불에 누워있는 거잖아. 내가 번 돈으로, 내가 골라서 사고, 그것도 사랑해마지않아서 여러 번 고민해서 결국에 산 이불이잖아. 그러니까 나는 깼다가도, 다시 잠이 들면 아주 깊이 잠들 거야. 좋으니까. 좋아서. 내가 덮은 이 이불이, 내가 누운 곳까지 좋아서.

 

  우리 아빠 기억나? 벌써 돌아가신 지 2년 반이 넘었어. 우리 집에 '애벌레 이불'이라고 불리는 이불이 한 채 있거든? 그게 아빠 이불이었어. 극세사에 초록, 연두, 베이지색 섞인, 한 10년은 쓴…. 겨울에 추울 때 임시방편으로 사둔 건데, 그랬다가 그게 평생 쓴 게 돼버린 그런 이불. 그 이불엔 늘 아빠가 들어 있었지. 아빠는 그걸 몸에 돌돌 말고 그 안에 들어 있었어. TV를 보고, 오징어를 씹거나 술상 앞에 앉아서도 그 이불이 무슨 껍데기처럼 아빠를 감쌌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빠한테 무슨 '황제 폐하' 같은 별명을 붙여줄 수도 있었는데, 우린 그걸 애벌레라고 불렀어. 애벌레. 애벌레 이불. 아빠는 이제 그 고치에 들어갈 일이 없지. 아빤 결국 나비가 된 거야. 애벌레 이불은 이제 내가 써. 나는 평생 여름만 빼고는 그 이불 안에서 계속 애벌레일 거야.

 

  그런데 그게 말했듯이 여름 이불은 아니니까. 이번 여름엔, 나는 나만의 애벌레 이불에서 애벌레처럼 잠을 잘 거야. 그리고 매일 아침. 정말 매일 아침. 나비처럼 눈을 뜰 거야.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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