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쳤다. 밤새 뒤척이며 이 꿈을 꿨다 저 꿈을 꿨다 하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가는 또다시 누워 이 꿈을 꾸고 저꿈을 꿨다. 꿈들은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탐조를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는 과정.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고, 아! 돗자리를 꼭 챙겨야 해. 오늘 밤새 비가 오니까 돗자리는 꼭 챙겨야 해! 돗자리, 돗자리.... 다른 꿈에서는 갑자기 내가 열이 38도까지 오른다. "이렇게 열이 올라서는 탐조를 갈 수 없어요. 코로나일지도 몰라요." 나는 "안돼! 안돼~!" 하며 운다. 그러니까 나는, 이 탐조를 무지무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그렇게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쿨한 척), 내 무의식은 이 탐조가 무진장 기다려졌던 것. 나는 마치 내일 놀이공원에 가기로 한 초등학생처럼 밤새 뒤척거렸다. '탐조를 가고 싶어. 새를 보고 싶어. 너무 기대돼. 떨려. 혹시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밤새 이렇게 말하는 무의식의 목소리가 꿈으로 펼쳐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올해로 서른둘이 된 내가, 이런 밤을 보낼 수 있다니! 나는 이것만으로도 생의 기적을 한 가지 맛본 느낌이다. 와, 어릴 적에나 있었던 설렘과 걱정이 꽉 찬 여린 마음. 이게 어디에 있었을까?
D-day.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나 해롱해롱 댔다. 왠지 잠이 달아나질 않아 이불 옆의 철제선반을 양손으로 잡고 지탱해가며 기어이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빨리 깨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왠지 설레는 마음에 평소엔 하지도 않는 린스를 머리끝에 발라 모발까지 코팅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엄마가 싸준 김밥' 일곱 줄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물은 너무 많아도 무거우니 250mL짜리 작은 병에 담는다. 엄마가 김밥을 한 줄 더 주는데, "에이 엄마, 넷이서 무슨 여덟 줄이야~" 했기 때문에, 김밥 한 줄은 삐친 얼굴로 식탁 위에 남았다. 아마 걔는 '너흰 꼭 나를 찾게 될 거야.'라며 고개를 휙 돌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남은 준비물들을 챙겼다. 그때 걔를 유심히 봤어야 했는데…. 아무튼 접사를 할 수 있는 휴대폰용 집게 렌즈, 작은 수첩과 펜 하나, 코로나용 마스크, 재난지원금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산 초코파이 인절미 맛 두 개와 흑임자 맛 하나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돗자리, 돗자리… 돗자리는? 빼먹었다.
아침에는 비가 그친다고 했는데 가랑비가 소리도 없이 계속해서 땅을 적셨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파주의 삼릉. 나는 동생 부부의 차를 얻어타고 세 개의 왕릉과 숲이 있다는 그곳으로 향했다. 오늘 우리를 인도해줄 꼬까새는 주차장 저-끝에서 홀로 걸어왔는데, 오기로 한 사람들이 비가 와서 그런지 다들 취소한 데다, 어제까지 간 보던 녀석도 결국 안 온다고 했단다. 그래서 우리는 달랑 넷, 오붓한 넷이 되어 피톤치드가 옴팡 나오는 숲을 걸었다. 사실 그렇게 많은 취소자가 있었다면 이 비 오는 날 탐조 자체를 취소할 수도 있었을 텐데… 꼬까새는 그러지 않았다. '놀러 가기로 한 약속을 지켜준 모부님'같은 느낌! 이날 탐조가 취소되었더라면 내 무의식은 분노에 휩싸여 조커 급의 이상행동으로 나를 몰아갔을 텐데… 꼬까새의 성실함이 세상을 구했다. Save the world~! 물론, 나는 이성적인 여자라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그런 꼬까새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수없이 많은 새들의 소리를 듣고, 나무를 보았다.
새를 볼 줄 안다는 건 인생 최고의 복이자 행운 중 하나로 꼽혀도 손색이 없다. 마치 꽃들의 이름을 알아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것만큼의 것인데, 나는 이제 이들이 없는 내 삶을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이렇게까지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지난 3월부터다. 10년을 살았어도 그 존재를 몰랐던 우리 동네 까치산의 진가를 지난 3월에야 발견했다. 나는 자꾸만 궁금해졌고, 또 궁금해졌고, 또다시 궁금해졌다. 누굴까? 누구의 소리일까? 이건 누굴까? 어떻게 이렇게 예쁜 꽃을 피웠을까? 이제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 와, 이 버섯은 분명히 어제는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자랐지? 가만히 앉아서 하루를 보내면 버섯이 자라나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었을까? 세상살이에 썩어 문드러진 마음에는 이런 호기심이 필요하고, 그러면 그 호기심을 양분 삼아 썩은 마음에도 꽃이 핀다. 나무가 자란다. 새들이 온다. 그러면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냥 백수가 되어 집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답답해서 좀 걸어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숲은 그런 내게 텃세 없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나는 선명하게 기억해냈다. 나도 이 일부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랑하고 있다.
나무들은 그저 거기 서서 매 순간을, 새들이나 비어 있음을, 천천히 소리 없이 늘어가는 검은 나이테를, 마음에 바람이 불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음을 사랑한다는 걸. _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35쪽
아침의 삼릉은 고요했다. 비는 우리가 조금 걷자마자 그쳤는데, 나무들은 그 비를 나뭇잎에 한껏 묻히고 있다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후드득 떨어뜨렸다. 정말이지 숲이었다. 나무와 그와 더불어 사는 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우리는 지도에 '피톤치드'라고 적힌 곳을 향해 걸었는데, 아주 작으면서도 검은 넥타이를 정갈하게 매고 있는 박새, 그보다 더 작은 쇠박새, 꼬리가 길어 '핫도그', '츄파춥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는 오목눈이, 주황색 배가 고운 곤줄박이, 노오란 빛을 이리저리 보여주며 춤추듯 걷는 노랑 할미새를 보았다. 우리 동네에서도 자주 보이는 뺨의 검은 점을 찍은 참새는 아기들에게 갖다줄 커다란 벌레를 물고 있었고, 직박구리는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는 때도 혼자 명랑하고 혼자 신이 나 있어서 나는 이번 탐조에서 그를 좋아하게 됐다. 머리 위로 삐죽삐죽 정리되지 않은 듯이 솟은 털까지도 참 그답고, 그래서 사랑스럽다. 아기 동고비는 물웅덩이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조용히 바라보는 우리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아직 숲이 우거진 여름은 아니어서 숲이 듬성듬성했는데도, 호랑지빠귀같이 경계심이 많은 새의 모습은 결국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었다. 그러는 중에 고라니 한 마리가 빠르게 산을 올랐고, 벙어리 뻐꾸기라 불리는 뻐꾸기도 봄봄 울었다. 꿩은 정말로 꾸엉-꾸엉 울고, 꾀꼬리는 여전히 이름처럼 꾀꼬리 같은 소리를 냈다.
'피톤치드' 구역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언덕에서, 다행히 꼬까새가 챙겨온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었다. 네 명을 위한 일곱 줄의 김밥 중 세 줄은 이미 삼릉까지 오는 차 안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므로, 꼬까새가 추가로 챙겨온 두 줄의 김밥에 남은 네 줄의 김밥이 우리의 점심이었다. 동생이 챙겨온 따뜻한 미소된장국은 일품 중 일품이었고, 결국 김밥은 '한 줄 더 있었으면 좋았을걸' 싶었다. 식탁 위에 두고 온 한 줄이 계속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얌냠냠 후룩후룩 냠냠 후룩 얌얌 후룩후룩. 우리가 새들을 보듯이 새들도 우리를 봤을 것이다. 처음 보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가 나무들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는 동안, 나무들은 우릴 어떻게 여기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좀 웃음이 난다.
땅에 발붙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로서 새를 본다는 것은 참 기묘한 일이다. 땅을 걷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하고, 그 사이에서 살아 '새'라는 그들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은 없다. 새처럼 난다는 것을 상상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 새들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 존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단하다는 정도로만 새들을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저렇게 날렵한 움직임을 가질 수 있는지, 저렇게 얇은 다리로 수풀 사이를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지, 어쩌면 저리 고운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숲을 거닐 때는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소리가 숲이 나를 감싸듯 나무보다 더 위에서까지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한 안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나무보다 먼 곳까지를 내가 속한 곳이라 느끼게 된다. 숲이 그러하듯, 새들도 나에게 내가 얼마만큼 이곳에 속해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새는 대단하다.
새는 돌연 가지를 박차고 날아갔고 그 바람에 연한 잎을 소복하게 매단 나뭇가지는 다시 흔들리다 멈추었다. 멍하니 서서 새가 몰고 온 작은 파문과 고요의 회복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서 엄청난 것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_ 권여선, <모르는 영역>중
꼬까새가 펼쳐 드는 새 도감을 보면, 수백 수천 가지의 다른 얼굴, 다른 깃털 색, 다른 몸의 형태를 가진 새들이 책장 사이로 날아오른다. 나는 아직 새들의 세계를 잘 모른다. 내가 조금 더 새들과 가까운 사람이 된다면, 꼬까새처럼 소리만 듣고도 그가 누구인지 어디쯤 있는지 알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나는 그때쯤엔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며 새를 동경하는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번쯤은, 그런 사람으로 살아있어 보고 싶다. 정말이지, 잠을 설칠만한 가치를 넘어서는 탐조였고 하루였다. 나는 언제 올지 모르는 세 번째 탐조를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20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