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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어수선

나의 첫 번째 탐조_2017

 

  있지, 그날 아침엔 머릿속에 딱 한가지 밖에 없었어. 일어나자마자 생각한 건 '내일 출근하면 뭐 해야하더라'. 내일 해야할 일, 내일 주어진 일, 그러니까 내일 할 일. 요즘 구멍난 배에 물들어오듯이 일이 찰랑찰랑 차오르니까 월요병은 갈수록 병세가 깊어지고, 출근 전날이 되면 내가 쉰 날동안 차올랐을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가면서 '뭐부터 할까' 순서까지 매기는거야. 생각하면 긴장되는건 말할 것도 없고. 괜히 배까지 아파. 그 날도 모처럼의 빨간날이었는데, 일어나자마자 후회했어. '약속잡지 말 걸. 이런 날은 그냥 늦잠자고 집에서 가만-히 에너지 비축하고 있다가 출근하는게 제일인건데.' 그래도 어떡해, 약속을 해놨는데. 꾸역꾸역 일어나서 주섬주섬 선크림만 바르고 나갔지 뭐.

 

  어딜 갔다온거냐구? 그날 '탐조'라는걸 갔어. 새 보는거야. 새를 왜 보냐구? 나도 그게 궁금해서 간거야. 나 일하는 사무실 건물에 생태교육센터가 하나 있는데, 그 센터 활동가님이랑 가까이 지내고 있었거든. 그분은 대학때 야생조류연구회에 들어가서 대학시절 내내 새를 봤대. 그분을 아는 사람들은 그분을 다 "꼬까새님~"이라고 불러. 야생조류연구회에서는 동아리원들하고 어울리는 새 이름을 지어준다는데, 그분은 꼬까직박구리새를 줄인 꼬까새로 불리우는거야. 이상하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야생조류'에 관심이 생기는건지, 세상에 참 신기한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어. 그러면서도 궁금하더라고. 도대체 새를 왜 보는거야? 새가 왜 궁금한거야? 새를 봐서 뭘 해? 새를 보면 뭐가 생겨?

 

  이 날 늦게 간 나를 맞아준 사람들은 여덟 명이나 됐는데, 대부분 야생조류회 회원들이었고 나처럼 처음 온 사람도 있었어. 야생조류회 회원들은 졸업하고도 종종 이렇게 만나서 새를 보러 간대. 각자 따로 가기도 하고 만나서 가기도 하고. 꼬까새님이 처음 온 사람들에게 쌍안경을 나눠주고 초점 맞추는 법을 알려주고, 팔당호수 근처를 빙- 둘러 걸었어. 걸으면서 꼬까새님이나 새를 오래 봐 온 사람이 "저기! 무슨 새다~"하면 다같이 멈춰서서 쌍안경을 눈에 갖다대고 봐. 그렇게 보고나면 솔닭새님이 자기가 가져온 새도감을 꺼내서 그 새가 어떤 새였는지 초보자들에게 보여주는거야.

 

  그거 알아? 참새들 말이야. 볼에 까만 점이 있다? 까치중에 등에 물빛이 나는 까치는 물까치야. 배랑 꼬리가 주황색인건 딱새. 그 날 본 호수에서는 연잎이 고요한 향기를 풍기는 동안 쇠물닭 한쌍이 열심히 물 속에 있는 줄기들을 모으고 있었지. 뱁새는 정말 동그랗고 작고 날쌔고 귀여워. "저기 뱁새다!"해서 쌍안경을 눈에 갖다대는 순간 다른데로 포로로 날아가버려. 쌍안경을 든 내 손도 바쁘게 움직여야 겨우겨우 볼 수 있어. 너무 사랑스러워서 왜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지는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 뱁새는 절대로 황새를 따라가지 않아도 될만큼 사랑스러웠거든. 그게 다가 아니야. 세상에 왠 새가 이렇게 많나 싶지. 나, 꾀꼬리가 노오란 날갯짓을 하는거 처음 봤어. 자꾸만 나무 사이에 숨어서, "못찾겠다 꾀꼬리"가 왜 나왔는지도 알게 됐지. 유리새는 등이 파란색으로 반지르르 빛나는데, 다같이 한참을 서서 넋을 놓고 바라봤어. 목소리는 또 얼마나 곱던지.

 

  거기서는 누구도 새나 벌레를 보고 나처럼 "이게 뭐야?"라고 묻지 않았어. "이건 누구야?"라고 했지. '새를 왜 봐? 새를 봐서 뭘 하는데? 새를보면 뭐가 생겨? 이게 뭐야?' 나는 왜 이런 질문들을 하는 사람이 됐을까? 있잖아, 그냥 그렇게 걷다가 새를 보고 이름을 부르고 귀여워하고, 또 걷다가 벌레를 보고 이름을 부르고 까르르 웃고, 그것 뿐이었어.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일이 두렵지 않은거야. 이 세상에 내 자리가, 그러니까 오늘 새들을 보고 온 거기에 내 자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인거야. 내가 아등바등 지키려고 숨죽이고 마음졸이는 내 일터 말고도 내 자리가 있는 거,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그런 마음... 이상하지? 새들이 있는 곳에 잠시 같이 있었을 뿐인데 숲이, 새들이, 호수가, 벌레들이 나의 뭘 믿고 그렇게 자리를 옴팡 내 준 건지 아직도 난 모르겠어.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독토독 비꽃이 떨어지더니 밤이 되니 사아-하고 쏟아지더라. 그날 밤엔 침대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만 했어. '이 비오는 밤에 새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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