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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어수선

하지

 

  마른 꽃이 오묘한 색을 내고 있다. 꽃다발은 퇴직과 함께 온통 보라와 분홍으로 내 품에 안겼는데, 나는 그 진한 보라와 우아한 진분홍과, 수수한 옅은 분홍이 아름다워서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었다. 한참을 화병에 꽂아두고 보다가, 좀 더 오래 보고 싶은 욕심에 노끈에 줄줄이 단 건 지난주. 열다섯 넘게 말린 꽃중 다섯, 아니 여섯만 바짝 말라 내 책상 위로 올라왔다. 아마 이 꽃들이 마르는 동안 헤어짐이 아쉬워 진흙밭 같았던 내 마음도 차츰 말랐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눈물이 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아주 조심스럽게, 마른 꽃들의 가장자리를 쓰다듬듯이 만져보았다.

 

  빛나던 보라는 자주가, 세련되었던 분홍은 베이비 핑크가 되었다. 마르고 나서 이런 색을 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바스라지지만 않는다면 이 애들이 내게 처음 왔을 때처럼 품에 꼭 안았을 것이다. 사실 내 책상 위에 오른 것들은 꽃다발 속에선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작은 꽃에 속했던 것들만 잘 마른 꽃이 되었다. 큰 꽃들은 영 마르질 않았다. 나는 마르지 않은, 앞으로도 마르지 않을 모양인 꽃들을 아쉬워하며 버리고선, 마른 것들만 위쪽이 볼록하고 투명한 유리병에 꽂았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예쁘다', '카메라에 대 보아도 예쁘다' 하다가 카메라에 찍힌 것과 내 눈으로 보이는 것을 여러 번 번갈아 보았다. 내 눈엔 영락없는 자주와 베이비핑크인데, 카메라에 비춰보니 방 안에서는 진보라가, 베란다에서는 쨍한 분홍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천천히 내려놓고, 무엇보다도 내 렌즈가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애들이 자주와 베이비 핑크로 보이는 내 렌즈.

 

  오늘은 낮이 길 것이다. 해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날, 하지라 했다. 베란다 밖 빨간 벽돌 빌라에 선명하게 갈라진 그림자와 빛의 대각선도 어제보다는 오래 저곳에 머물 것이다. 빛을 좋아하는 우리 집 베란다의 치자나무와 유칼립투스에게 오늘 같은 날은 다시 없을 행운의 날일테지. 나는 좁은 베란다 이쪽저쪽을 돌며 이 애들이 낮이라 불리는 동안엔 원 없이 햇볕을 쪼이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나도 이 여름이 좋다. 낮이 길고 밤이 짧아지는, 비는 좀 오겠지만 그마저도 반가울 이 여름을 좋아하고 있다. 직장이라는 차양 없이, 동료였던 너라는 그늘 없이 오직 혼자서 뜨거운 햇볕을 쬐어야 할 이 여름은 나에게 다시 없을 뜨거운 계절로 남을 것이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두렵다. 나는 바짝 마르고, 쪼그라들고, 또 바스라질 듯한 아슬아슬함으로 이 여름을 지날 것이다. 여름이 지나면 나는 자주나 베이비핑크가 될까? 내가 그동안 물을 너무 많이 머금은 큰 놈이라면 이 여름은 내가 자주나 베이비핑크가 되기에 짧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그런데 오늘 일식이 있단다. 오후 3시부터란다. 2020년대의 마지막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쩌다 알게 된 이 소식이 반갑고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달이 잠깐만 해를 가려주면 내가 좀 덜 떨지 모르니까. 이 길고 긴 낮에, 해가 가장 높이 떠서 나를 쪼일 여름의 한가운데서, 10년에 한 번, 앞으로 10년간 딱 한 번일 거라는 일식으로 해가 조금만 가려지면, 나는 앞으로 내게 그늘 같은 건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서 조금은 놓여날지도 모른다. 하지에 찾아온 일식. 나는 이미, 여름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지날 행운 아래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생각해버리고 나니, 괜히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길은 다시 마른 꽃들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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