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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어수선/성우로드

Outro 성우. 어디에나 있는데 아무 데도 안 보이는 사람들. 나는 이 사람들이 반갑다. 어딜 가나 마주치는 목소리들이 반갑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느낌을 가지고 이 방송을, 이 안내를, 이 광고를 녹음했을까 생각하다 보면 칙칙한 회색 도시에 깃털 색 영롱한 새 한 마리가 날아드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버스, 지하철, 거리, 어디에서든지. 인생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봐!”라고 수도 없이 쏟아지는 거짓말 속에서 ‘어떻게 나는 나만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싸우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을 시작할 때와 달리 마지막 장을 쓰고 있는 나는 직장을 그만두어 무직자가 되었다. 이제 직업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데다, 직업 성우가 될 확률도 여전히 없는 축에 속하지만 학원은 계속해서 .. 더보기
10. 베짱이의 기쁨 그래, 나도 안다. 성우학원만 안 다니면 돈이 모일 거라는 거. 한 달에 40만 원이니까, 1년이면 480만 원에, 2년이면 천만 원 가까이… 나도 이 정도 계산은 된다. “그래서, 너 성우 될 거야?” 성우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당연히 이게 가장 궁금하긴 하겠지만, 저기에 대고 “될 리가 있냐~”하고 웃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나는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내가 성우학원에 다닌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자꾸 나의 ‘투자’에 ‘아웃풋’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데, 여기서 아웃풋은 성우가 되는 것. 그래서 투자한 만큼 뽑아내는 것, 딱 그뿐이다. 휴직해서 생활비나 겨우 버는 주제에 적금 깨 가며 월 40을 쓰는 나는, 겨울이 닥치면 개미들에게 비웃음을 살 베짱이다. 개미들에게 내가 무엇을.. 더보기
9. 완벽과 흑역사 사이 흑역사. 문득문득 생각나 뇌리를 스칠 때마다 “아오 썅!”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것. 영화상영 도중에 잘못된 커트가 중간에 쓱 껴 들어간 것처럼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이건 뭐,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무의식의 자기보호 기능인 것인지, 아니, 자기보호 기능이라면 차라리 싹 잊는 게 가장 자기 보호적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아무튼 희한하다. 머리를 아무리 털어대도 털려 나가지를 않는다. 내가 다니는 성우학원은 단연코 흑역사 제조장, 제조소, 제조 공장, 제련소, 흑역사를 딛고 역사를 만들어 가야만 하는 구덩이, 시궁창, 던전, 지하 감옥…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나에게도 선보인 적 없는 발연기를 해야 하니까. 목소리가 뒤집어지는 건 예사요, 장기라곤 없어 매번 도라에몽 .. 더보기
8. 몸의 사람이 되기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나는 꼭 아이에게 무용이나 검도, 노래나 태권도 같은 것을 배우게 하고 싶다. 머리가 커지기 전에 그저 몸으로만 하는 일을 가르쳐 주고 싶다. 자기 몸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얼마만큼 힘이 셀 수 있는지, 어느 정도 범위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몸에 익히도록 하고 싶어서다. 아마 그러면 아이는 내면에 자신의 몸- 자기 존재의 감각을 또렷이 새기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런 걸 배운 아이는 아니었다. 내 생에서 몸의 감각을 마음껏 느끼고 사용해본 시기는 그나마 내가 사회의 눈치를 덜 보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였던 것 같다. 나는 내성적이고 움직임이 작은 아이였는데, 이 사회는 여자애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까지 여기니, 중학생이 되어 검도를 배.. 더보기
7. 내 목소리는 내 캐릭터를 완벽히 표현하고 있다 우리 학원 선생님들은 프리큐어 출신이 많다. 프리큐어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올드…) 네일큐어 아니고 패디큐어 아니고 프리큐어.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마법전사수가 제일 많은 걸로 기네스북 기록을 세웠다는 이 전설의 만화는, 평범하게 살던 소오녀들이 초능력을 가진 프리큐어라는 전사로 변신하여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응, 하고 싶은 말은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무척 고우시다는 것. 이들 얼굴을 보라. 어떤 소리가 나겠는가. 나는 매주 수요일, 이 프리큐어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혹시 삶의 태도가 소리에 반영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들은 진짜 우아하고, 기품이 있으시고, 수업 하실 때도 학생들 각각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이지 ‘아름답다.’ 격려는 .. 더보기
6. 느린 숨을 쉬는 사람 낭독하는 동안에는 녹음기를 켜 둔다. 그러면 거기엔 나보다 높고 가는 소리를 내는 누군가의 음성이 담긴다. 소오름. 누구지? 누구긴 누구야, 나지. 벌써 몇십 개 넘는 녹음 파일이 생겼는데, 다시 들어보며 낯설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주 정직한 내 목소리. 몸의 어딘가에 닿아 울리는 소리 하나 없이 매끈하게 몸을 빠져나온 쌩生목소리. 고-오맙다 녹음기야. 그런데 듣다 보니 목소리가 문제가 아니다. 호흡이 더 귀에 ‘띈다.’ 짧고 바튼, 한 문장도 여유 있게 읽지 못하고 문장의 말미에 가선 숨이 차고 마는 게 녹음 파일에 여지없이 담겨있다. 호흡이 가쁜 거다. 단단하게 소리를 받쳐주지 못하는 거다. 그러니 문장은 자꾸만 구멍 난 풍선에서 쉬익-바람이 빠지듯 사그라들고 만다. 자기 호흡에 관심을 기.. 더보기
5. 낭독의 효용 나는 가끔 브레이크 없는 차를 운전하는 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무척 당황하며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찾으려 발을 이리저리 뻗어 보는데, 없다. 왜냐하면, 브레이크가 없는 차거든. 하하하… 이건… 내 인생을 비유하는 꿈일까? 멈출 수 없어 폭주하다 어딜 들이받고서야 멈추는… 허어엌. 소오름! 그러네. 맞네. 나는 폭주하듯 멈추지 않고 살다 몸이 아프고 나서 강제로 멈춘 상태다. 아, 그러나 휴직을 했으면 뭘 하나. 나는 매일 매일 나의 몸을 버리고 저만치 혼자 가 있는 정신을 붙들어오느라 바쁘다. “야 가지 마! 여기 있어! 어차피 일 못 해. 어차피 힘 못 써.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야 돼, 가마니처럼! 야!!” 좀처럼 몸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나 때문에 내가 고생이 심하다. 아무래도 영혼과 육체는 분.. 더보기
4-1. 대본이라는 거울 “넌 스타-일이 없어.” 당장이라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 것 같이 자신만만하고 튼튼한 이빨을 가진 대학 동기가 이렇게 말했었더랬지. 맞다. 그 애의 눈엔 내가 아무런 특징도 없는 밍숭맹숭이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발산하는 에너지보다는 흡수하는 에너지를 주되게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말을 듣고도 ‘그런가?’ 했을 뿐이다. 나는 외부에 내 느낌과 감정을 표출하며 영향을 미치기보단, 외부의 자극과 타인의 반응을 받아들이는 데 더 많은 힘을 쏟는 사람. 그러니까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길게 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가는 데 저 국회의원감 친구보단 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세상의 수많은 자극 속에서 내 작은 목소리를 듣기란 너무나 어렵다- 이 말이다. 그런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