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스타-일이 없어.” 당장이라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 것 같이 자신만만하고 튼튼한 이빨을 가진 대학 동기가 이렇게 말했었더랬지. 맞다. 그 애의 눈엔 내가 아무런 특징도 없는 밍숭맹숭이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발산하는 에너지보다는 흡수하는 에너지를 주되게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말을 듣고도 ‘그런가?’ 했을 뿐이다. 나는 외부에 내 느낌과 감정을 표출하며 영향을 미치기보단, 외부의 자극과 타인의 반응을 받아들이는 데 더 많은 힘을 쏟는 사람. 그러니까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길게 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가는 데 저 국회의원감 친구보단 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세상의 수많은 자극 속에서 내 작은 목소리를 듣기란 너무나 어렵다- 이 말이다.
그런 내가 나를 보는 유일하고도 적극적인 방법이 글쓰기다. 나의 가장 여린 것과 분노에 찬 뜨거운 것, 냉소와 떨떠름함 등 다양한 모습이 글을 통해 나온다. 내 나름의 과감함과 나름의 과격함 같은 것이 글 안에서 요동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글쓰기는 나라는 틀 안에서 나오는 것. 내가 학원에 가서 받아드는 대본과는 확실히 다르다. 정말 그렇다. 대본을 받아드는 건 완전히 다른 행위! 대본은 매번 나에게 ‘내가 아닐 것’을 요구한다. 글쓰기가 내게 주로 내적인 작업이라면, 이건 ‘밖으로의 표출’을 넘어서 그냥 내 밖으로 힘껏 뛰어나가는 작업이랄까. 자연히 나는 나의 바깥에 서서 내가 누구인지 또렷하게 보게 된다. 이때만은 나도 목소리가 좀 커지는 것도 같다. “안 돼, 안 돼. 이거 나 아니야. 나 못해” 할 때마다 말이다.
삼류에 냉소적인 나, 징징거리는 문체에 치를 떠는 나, 지적인 정보에 압도당하는 나, 평가나 판단에 급급해 글에 몰입하지 못하는 내가 보이는가. 신파에 눈물짓는 나, 대중적인 로맨스를 읽으며 남몰래 짜릿함을 느끼는 내가 보이는가. 그 외에 어떤 것들이 보이는가. 그게 무엇이든 나에 대해 봤다면 된 게 아닐까. 치유는 바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되니까. _ 박미라, <치유하는 글쓰기> 중*
어떤 글에 반응하는 태도가 그를 보여준다고 했다. 내가 싫어하는 글이든, 좋아서 미쳐 날뛰게 되는 글이든 결국 그것이 나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한다고. 맞다. 그리고 그건 대본도 마찬가지다. 혹여 글로 읽을 때는 드러나지 않던 감정들도, 내가 직접 글 속의 ‘그’가 되어야 할 때는 극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은 그렇게 드러난다. 만약 ‘내가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부터 제쳐 나가는 방법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꽤 도움을 받았다. 아주 적극적인 발연기를 통해서.
■ 세 종류의 대본, 결론은 하나
내게 대본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극혐 대본. 이런 대본들은 주로 이해가 안 되고, 화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데에 극혐의 이유가 있다. 두 번째는 겪어봐도 못하는 대본. 받아들자마자 옆자리 친구에게 “야, 나 이거 겪어 봤잖아. 내 얘기잖아. 이거.” 자신 있게 엄지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며 말하고 싶어지는 그런 대본. 세 번째는 그냥 못하는 대본. 이런 대본은 받으면 심히 낯설고, 의아하고, “누… 누구… 세여? 왜 이러세여? 모… 모야…!!!” 싶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나는 이 세 종류의 대본 중 뭘 받아도 못한다. 극혐이라 못하고, 겪어봐도 못하고, 그냥 못한다. 자꾸 발연기를 해대는 건 정말 미칠 노릇이지만, 하하, 난 미치지 않지! 이게 취미란 것의 힘이다! 이렇게 정신승리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보자면 ‘내게 잘하고 못하고보다 중요한 건, 못하는 것이 나를 드러내 준다’는 거다. 물론, 잘하는 연기가 있다면 그것도 나를 드러내 주겠지… 그렇겠지? 응… 모르겠다. 겪어보질 못해서.
1-1. 아니, 이해가 안 되네? 왜~이래? 나 못하겠어어-! 극혐 대본 (1)
나는 애절비극여리여리사랑해 대본을 못 한다. 난 여자라 남자 아역이 아닌 이상 여자 역을 해야 하는데, 꼭 이런 대사는 여자들이 하게 되어 있음…. 특히 여자 주인공을 의도적으로 비리비리비실비실여리여리너없음나죽어제발나좀사랑해줘흑흑갑자기달려가안긴다 해 놓으면 미칠 것 같다. 일부러 도라에몽 목소리로 그 대사를 한 번 읊어야만 메스꺼웠던 속이 좀 풀리는데, 그래도 진심을 담아 하긴 해야 하는 게 고역인 것이다. 엏!떻!게!든! 화자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나의 노력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의 노력. 내가 이 취미를 평생 끌고 간다면 내 몸에서는 사리가 나올 것…. 으으, 정말이지, 로맨스가 너무해~!
(울먹이며) 나두 잘 몰랐었는데 이제야 겨우 알게 됐어.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아침에 눈 뜰 때, 잠들 때, 항상, 니가 가장 먼저 생각 나. 회사에서도 너만 보이고, 니 목소리만 들려. 내 마음...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해 (중략) 나랑 정말 헤어지겠다는거야? 내가 이렇게 매달려도? 그래도 헤어지겠다는 거야? 내가 잘못 했어. 니가 나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모른 척 했어. 벌 받을게. 벌주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치만 제발 헤어지잔 말만 하지마. 너 때문에 가슴이... 철렁했단 말이야. (중략) 박우진 너 왜 그래? 그러지 마. 나 진짜 무섭단 말야. (울음 터지며) 너 진짜 가는 거야? 얼른 돌아와! 셋 셀동안 안 오면 나 너 다신 안 볼 거야. 하나 둘 셋... 박우진! 이 나쁜 자식 _KBS 무대 <한 달만 사랑할게!> 중**
└ 참고로 학원에서 시험을 대비하며 받는 ‘단문 대본’은 상대의 대사가 빠진 형태다. 지망생들은 이런 단문을 받아들고, 상대의 말과 표정, 상황을 스스로 감각하여 연기해내야 한다. 여기에서 (나에게만) 비극은 대본의 저 말줄임표 몇 개까지도 구현해 내야 하는 것이 성우라는 점에 있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으신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작가님, no offense. 악의는 없어요. 이건 그냥 예시로 쓴 것이고, 박우진이가 말하는 대사가 합쳐지면 또 느낌이 다르겠지요. 그리고 평론이란 원래 평론가를 드러내는 거지 작가를 찌르는 게 아니랍니다….
나는 이런 대본을 받으면 “흐아아아아…” 울먹인다. 옆자리에 앉은 옥구슬 자매에게 “아니, 저기… 도대체 이렇게까지 사랑할 일이 세상에 있는 거야?”라고 묻고 싶지만 한참 몰입 중인 그의 감정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지. ‘흐아아아~ 난 이런 상황에 나를 빠뜨리고 싶지 않다~’ 그게 내 심정이다. “여주인공아… 벌 받는다며… 지금 헤어지는 게 벌인 것 같아, 친구야! 겸허히 받아라~” 라고 해주고 대본을 덮고 싶다.
물론 나에게도 애절한 사랑은 있었다. 다만 그땐 나라는 존재가 명료하지 않았다. ‘내가 너구~ 네가 나구~ 내 인생 같은 거! 너 없!으!면! 안! 되는’ 그런 불안한 상태. 그렇게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불안 불안하게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던 그때가 아름답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되돌아보면 참 피곤했다. 그건 피곤한 게 맞다. 인생에서 로맨스 아닌 다른 것은 모두 거세하고, 모든 것을 다 하나의 관계를 위한 것으로 퉁 치는 게 피곤치 않을 리가 없다.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렇게 정신승리 격으로 탈현실하여 상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보통 에너지가 드는 것이 아니다. 거세 되는 것에는 당연히 연애를 제외한 나의 고유한 삶이 포함되어있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아니, 너, 너, 너는 네 삶이 없어? 아니, 왜 ㄱ,걔,걔, 걔가 없으면 니가 죽니…. 학생시절을 지나 인생이 조금만 복잡해지기 시작해도, 더 이상 그런 탈현실이 가능한 에너지조차 남지 않는 게 우리네 인생인데, 정말 대단한 에너자이저들이 이 세상에는 많은 것이다.
에너지가 달리는 나는 그래서 발연기를 하는 것이고 가짜 눈물을 짜내는 것이다. (궁색한 변명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가끔 내가 이 로맨스라는 감정을 조롱에 가까운 태도로 대하는 건 좋지 않은 사인(sign)인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할 것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것. 그건 좀 문제가 있다. 나에겐 ‘네 로맨스가 지금 왜 문제적인지’ 열변을 토하거나 극혐 하지 않고도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와야 한다. 저런 로맨스라도 내 앞에 선 너의 고유한 이야기와 감정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시점. 그러나 강조하건대 “너도 다시 사랑을 해보면 달라질거야~” 같은 조언은 사양이다. 되돌아갈 순 없다. 로맨스 이외의 현실을 봤다는 건 불타는 다리를 건넌 것이고, 빨간 약을 먹은 것이다. 나는 그저 나선형 계단을 오르듯이- 위에서 볼 때는 이전과 똑같은 지점에 서 있는데, 옆에서 보면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올라서야만 한다.
1-2. 나처럼 해봐요~! 노력을~! 극혐대본 (2)
기쁨은 쉬운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대부분 비슷한 답변을 할 겁니다. 더 관심있는 질문은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지속하고 싶은 고통은 무엇인가요? 이 대답이 여러분을 더 나아지게 해 줄 겁니다. 이 질문이 여러분의 삶을 바꿔줄 겁니다. 이 질문이 나를 나로 만들고, 당신을 당신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이 질문이 우리를 정의하고, 구분하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묶어줄 겁니다. (...) 이건 의지력이나 '그릿(grit)'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이건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다'류의 충고가 아닙니다. 이건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삶의 요소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성공을 결정합니다. 이제 현명하게 무슨 노력을 할 지 선택하세요. 친구여. _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중***
└ 의지력이나 그릿이 아니라면서 왜 또 노력을 말씀하시는거지여…? 그건 차치하고 제발… 2020년엔 이렇게 단순한 노-력과 인과응보에 대해 말하지 말아줘요. 콩 심었는데 두더지가 파 처먹고 팥 심었는데 그 위에 폭탄 떨어지는 세상이라구요!
?
번역의 문제인가?
아니, 솔직히 말해 봐여 저자 양반… 본인도 본인이 무슨 말 하는지 정확히 모르져…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너무나 파워 당당, 책을…? 책을 냈어? 당신의 그 당당함과 자신감은 너무나 닮고 싶군요! 진심이에요.
신기하고 무섭게도 글에는 저자의 많은 부분이 드러난다. 나는 이 대본을 받아들고 읽으면서 깨달았다. “아, 피부색 좀 밝은 미쿡 남자가 하는 말이구나!” 찾아보니 빙고! 빙고다!! 이 글은 희한하게도 저자가 누구인지 찾아보기도 전에 대본을 읽는 내 태도를 바꾸어 놓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괜히 어깨를 펴고 배를 내밀고 툭툭 거들먹대며 말을 던져본다. “더 재밌는 질문을 해보죠. 아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일 겁니다!”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감이 흘러넘쳐야 한다. 이렇게나 성격이 명확한 글이라니.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캐릭터다. 나는 누가 코치해주기도 전에 미국인 코스프레를 하며 대본을 읽어댔었더랬다. 후…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이 책 하나만 남은 그런 곳일 것.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녹음을 해야 하는 숙제 때문에 자그마치 A4 세 장짜리 이 고역 덩어리(!)를 하루에 세 번 이상 읽었다. 흐아아아아아~ “어떤 이득을 바라면 그 대가까지도 원해야죠! 오, 맙소사! 제가 실패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오, 맙소사! 제가 정말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젠장, 실패라 하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노력하지 않았다구요. 오, 맙소사! 여러분, 저는 지금 의지력이나 노력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성공을 결정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하… 진짜 맙소사… 오, 맙소사…. 읽을 때마다 제발 이런 사고방식이 내 뇌리에 무의식적으로라도 박히지 않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을 때는 도저히 나로서는 읽을 수 없어 계속해서 미국 국적 백인 남성의 영을 끌어다 빙의시켜야 했다. 자꾸 그 영혼이 꿀렁꿀렁 내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 왔다가, 다시 툭 튕겨 나갔다가 들어 왔다가를 반복했다. ‘울 학원에서 내가 제일 연장자란 말야… 숙제해야 된단 말야… 안 하면 좀 창피한 거란 말야아아아’ 꿀렁~ 꿀렁, 내 몸 밖으로 영혼이 꿀렁, 꿀렁~ 나는 강철의 의지력으로 열흘가량 숙제를 하다가 끝내… 다른 텍스트로 갈아탔다. 이걸 진지하게, 내 말처럼 읽으려니 아주 죽겠다고요! 성우, 그러니까 연기자가 되기는 글러 먹은 것이다.
*2편에서 계속…
매주 화/목 나타납니다. 성-우로-드
* 박미라 지음, 치유하는 글쓰기, 한겨례출판, 2008.
** 2017.02.04. 방송. 극본 장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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