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브레이크 없는 차를 운전하는 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무척 당황하며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찾으려 발을 이리저리 뻗어 보는데, 없다. 왜냐하면, 브레이크가 없는 차거든. 하하하… 이건… 내 인생을 비유하는 꿈일까? 멈출 수 없어 폭주하다 어딜 들이받고서야 멈추는… 허어엌. 소오름! 그러네. 맞네. 나는 폭주하듯 멈추지 않고 살다 몸이 아프고 나서 강제로 멈춘 상태다. 아, 그러나 휴직을 했으면 뭘 하나. 나는 매일 매일 나의 몸을 버리고 저만치 혼자 가 있는 정신을 붙들어오느라 바쁘다. “야 가지 마! 여기 있어! 어차피 일 못 해. 어차피 힘 못 써.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야 돼, 가마니처럼! 야!!” 좀처럼 몸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나 때문에 내가 고생이 심하다. 아무래도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내가 그 증거다. 내 영혼이 맨날 몸을 빠져나가거든.
그런 중에 매일 30분씩 하는 소리 내어 책 읽기, 낭독은 꽤 도움이 된다. 실제로 학원 숙제이기도 해서 숙제하듯 하는 거긴 하지만 백수의 하루 중 한없이 늘어지는 시간, 텅 비어버리는 시간에 하면 괜히 뭐 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렇다. 꽤 괜찮은 시간 때우기인 것이다. 사실 책이라곤 정복하듯 탐욕스럽게 먹어온 내가, ‘한 권 더 읽었다’는 성취로 읽도록 길들여진 내가, 느리게 읽기도 안 되는 마당에 낭독이 될 리가 없다. 그동안의 내 인생에 낭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마 숙제가 아니었다면, 입으로 읽는 그 속도와 낮은 효율이 답답해서 꾸준히 해내지도 못했을 거다. 그러나 해준아, 이 정도 환자가 되었으면 이제는 살아왔던 방식을 전부 뒤엎어도 모자라다, 응? 낭독, 그건 나 같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기에 아주 적합한 활동. 나는 그 활동에 나를 던지고 있다.
저이는 알고 있는 듯도 하다. 글쓰기에 삶의 속도를 늦추는 요철 기능이 있고 삶의 방향을 이끄는 안내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 이미 축복.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_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중¹
속도가 비슷해서일까, 낭독도 글쓰기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책을, 그것도 좋아하는 책을 골라 소리 내어 읽으면 마음과 생각이 몸이 머무는 곳에 와 머문다. 그 순간만큼은 유체 이탈이 없다.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순간이다. 저만치 훌쩍 앞서가길 좋아하는 내가, 내 몸이 읽어내는 딱 그만큼만 읽는다. 가만 놔두면 한없이 시간을 빨리 감기하여 뛰어가고, 뒤따라오기 바쁜 몸에 채찍질을 가했을 내 정신이, 드디어 내 몸의 시간에 저를 맞추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몸의 일일 텐데… 나는 너무 오래 몸 없는 사람처럼 나대고 다녔다. 몸의 시간을 오롯이 산다는 것. 급할 것도 불안해 할 것도 없이 그 순간에, 그 문장에만 머무는 것. 낭독은 내게 그 감각을 일깨운다.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만큼, 소리 내어 읽는 속도 딱 그만큼, 삶을 채우고 싶게 한다.
낭독은 감정과 정서가 있어야 낭독이다. 가슴으로 받아들인 것을 목소리로 꺼내는 것이다. _ 서혜정, 송정희 <나에게 낭독> 중²
‘받아들임’이란 누구에게든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아니던가. ‘성우는 어떻게 하면 원고 안에 담긴 감정, 표정, 색깔, 부피, 질감 등을 제대로 표현할지를 연구 한다’³는데. 글의 감정, 표정, 색깔, 부피, 질감까지…. 이것은 분명 글을 직접 만져보고, 입을 대보고, 씹어도 보고, 맛보는 일. ‘지금’을 사는 일이다.
느린 것, 순간에 머무는 감각은 삶에 있어 너무나 소중하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용 씨- 자연이 좋고 호랑이가 좋아서 시베리아 호랑이를 따라다니며 5천 시간 이상을 카메라에 담은 사람 -를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거의 울 뻔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혔다는 느린 시간의 감각이 내게도 절실해서였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소를 파는 아버지의 조수 노릇을 하며 홀로 밤새 산길을 걸어 소를 끌고 시장에 갔다던 사람, 한없이 분주하고 희로애락이 이리저리 솟구치는 낮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고요하고 느린 밤의 시간을 몸으로 겪어보았다는 이 사람의 이야기가 내 마음 어딘가를 울렁이게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긴 호흡을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맘에도 낮에 내가 봤던 것이 뭔가 짧다는 걸 느낍니다. 낮과 밤이 빛과 어둠의 의미를 떠나 또 다른 의미로 정반대의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낮에 시장에서 있었던 일, 병을 들고 싸우던 거나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붓던 일, 그런 일들이 숲을 걷다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달밤에 새하얀 눈에 시장의 모습들이 반사되어 빙빙 돌아갈 때 그런 낮의 시간이 부질없고 누추해지고 덧없어지는 것입니다. 난 점점 한쪽은 싫어지고 한쪽은 좋아졌습니다." _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박수용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⁴
여기에 덧붙여 <나에게, 낭독>이라는 고운 책을 쓴 성우는 어려서부터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한다. 그 어린 마음에서부터 몸의 시간이 켜켜이 쌓였겠구나, 싶다. 소를 끌고 어둡고 고요한 밤을 한 발짝 한 발짝 걸었던 저 소년과 같이, 이 성우도 느린 몸의 시간을 걸어 아름다운 문장들을 소리로 몸에 새겼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 쌓였으니 그렇게 고운 소리를 내게 된 거겠지. 나로서는 소를 팔러 밤새 산길을 걸을 일이 없으니, 매일 30분씩은 낭독으로, 온전히 몸의 시간을 살아본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은 어디에도 없을 영원의 순간이 된다. 누구도 훔치지 못할 나만의 것이 된다. 낭독.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 그래서 나를 살게 할 일.
당신도 가끔 브레이크 없는 차를 운전하는 꿈을 꾸는지, 또는 그 같은 하루나 일주일이나 한 달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늘 시대에 물들어 사니, 아마도 내가 꾸는 이 악몽은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평범한 꿈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란 게 시대를 막론하고 고달픈 건 매한가지라지만 이렇게 빠르게 질주하는 듯한 시대는 지금뿐일 테니까. 나는 느린 것은 답답하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살다 숨은 쉴지언정 긴 호흡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게, 느린 호흡으로 삶을 가다듬는 게 뭔지도 모르게 될까 두렵다.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을까 궁금하고, 괜한 오지랖에 걱정도 되어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보기 좋은 문장을 골라봤다. 이걸 낭독하는 순간만큼은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는 푸른 정글 한가운데서 행복한 나무늘보가 되어 보시기를.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는 푸른 정글 한가운데, 나무늘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귀가 먹먹해지는 폭우에도 나무늘보는 개의치 않는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에 만물은 다시 소생하고 동물들도 폭우를 고맙게 생각한다. 그 와중에 나무늘보는 책을 가슴에 품고 빗물에 젖지 않도록 보호한다. 나무늘보는 한 단락을 겨우 읽었다.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무늘보는 그 단락을 다시 읽는다. 나무늘보는 그 단락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나무늘보는 그 이미지를 되새긴다. 아름다운 이미지이다. 나무늘보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무늘보는 아주 높은 가지에 매달려 있어서, 정글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빗줄기 사이로 다른 나뭇가지들에 맺힌 밝은 점들이 보인다. 예쁜 새들이다. 아래에서는 화난 재규어가 앞만 쳐다보며 맹렬하게 달리지만, 나무늘보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자족의 한숨을 내쉬며 나무늘보는 온 정글이 자신과 함께 호흡한다고 생각한다. 폭우는 여전히 계속된다. 나무늘보는 느긋하게 잠든다.
_얀 마텔,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⁵
* 매주 화/목 나타납니다. 성-우로-드
¹ 은유 지음, 글쓰기의 최전선, 메멘토, 2015, 46페이지 중
² 서혜정, 송정희 지음, <나에게, 낭독>, 페이퍼타이거, 2018. 내용은 2장 중에서.
³ 박형욱, 김석환지음, <내레이션의 힘-말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예문아카이브, 2018
⁴ 정혜윤 지음, 사생활의 천재들, 봄아필, 2011. 내용은 46쪽
⁵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작가정신>,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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