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문제로 학원을 한 3개월 쉰다는 게 6개월이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퀴퀴한 느낌이 나던 내 연기는 6개월 새 푹 썩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푹- 쉬었그든. 나의 이 퇴행은 썩는다고 된장처럼 더 구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패’라서 문제인 것….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연기였는데… 왕초보의 연기라는 것은 이렇게 푸슬대는 똥 같은 것이로구나! 새 마음으로 신나게 재등록은 했건만, 첫 수업부터 자꾸만 그냥 환불받고 집에 가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언제는 잘해서 재미있었느냐 마는… 아, 못하니까 재미 없엉.ㅋ
성우는 연기자다. 영어로도 Voice Actor. 이게 목소리로만 연기한다고 해서 ‘가짜 연기’를 하거나 ‘연기하는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진짜 연기’를 해야만 목소리로 그게 나온다. 당연히 성우 연기는 에너지 응축의 결정판이다. 게다가 녹음이라는 게 성우 혼자만의 작업이던가. 때론 녹음환경과 소리를 살려주는 디테일의 부족에 따라서 과하니 어색하니 하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밀도 자체가 다른 연기’ 그게 특징일 수밖에 없다. 나처럼 발연기를 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건 너무나 섬세하면서도 단단해야 하는 작업이다. 표정과 배경 같은, 보이는 것을 한데 모아 오직 목소리로만 표현해야 한다니. 극의 분위기와 앞으로 전개될 방향과 미세한 감정까지 암시해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보통은 표정과 몸짓으로 드러날 그것들을, 듣기만 해도 눈에 그려지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이 틀림없다.
학원에 다니면서 듣는 귀는 생겼는지, 요즘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뭐가 이리 어색하지’ 싶어 찾아보면 성우 더빙이 아닌 경우다. 연기를 못 한다는 평가를 받는 배우가 아닌데도 더빙을 하면 그렇다. 어딘지 밍밍-하고 어색하다. 반면에 학원을 다니면서야 알게 된 <KBS 무대>, <KBS문학관>¹ 같은 걸 듣다보면, 또 성우들이 낭독한 오디오북을 듣다 보면 화면이 없어도 어느새 귀가 스피커 속에 빨려 들어가 있다. 먼~옛날, 소여물 끓이는 장작 연기 가득 찬 방에서 라디오로 <마루치 아라치>²를 듣느라 눈이 매운 줄도 몰랐다던 우리 엄마처럼. 손가락 몇 번 튕기면 호황 찬란한 유흥이 가득한 휴대폰을 저기 두고, 나는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아니, 누군가가 내 귀를 잡아당기는 게 틀림없다. 여기서 꿀 팁! 들으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를 한 번씩 외쳐주면 더 재미있어진다. 아무래도 내가 학원을 다니면서 직접 해보고 ‘와 이게 쉽게 나는 소리가 아니구나’를 깨달으니, 이런 극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 어디서… 발 냄새 안 나요? 아, 죄송해요. 여기 제 연기가 있었군요.
내가 발연기를 하느라 무척 피곤하면서도 학원을 계속 다니는 건, 연기의 세계라는 것이 참 흥미롭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게 결국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생각해보라. 나 아닌 누군가를 표현해내야 하는데, 그게 어떠한 이해 없이 가능한 것인지. 거기에는 이해를 넘어 공감. 공감을 넘어서 빙의하듯 그 상황을 겪어내는 타자와의 합일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계의 희망이 아닌가…! (두둥!) 대본을 보면서 ‘이런 단어를 자꾸 쓰는 사람은 성격이 어떨까? 생김새는 어떨까? 어떤 목소리를 낼까? 평소에 말투가 어떨까? 숨은 가쁘게 쉴까, 느릿느릿 쉴까?’ 등을 생각해보는 시간은 참 고민스럽지만, 보물을 캐듯 재미있기도 하다. 내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는 뇌세포 운동 시간! 단편적으로 늘어져 있는 듯한 대본이 살아나듯 눈 앞에 펼쳐질 때의 경이로움…! 물론 이걸 펼쳐주시는 건 주로 슨생님이시지만… 나는 매번 학생이 아닌 관객이 되어 넋을 놓는 것이다.
이야기에서 캐릭터라는 것이 고유해지려면 그에게는 꼭 그에게 장점이자 단점인 특징, 결함 또는 상처가 있고 그게 이 캐릭터에게 고난이나 장애물로 등장해서 이 자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게 이야기의 법칙-이라고 김연수 작가가 그랬다.³ 그러니 그저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 대본은 있으려야 있을 수 없고, 설사 그런 장면이 있더라도 캐릭터의 내면은 무언가로 인해 소용돌이쳐야만 한다. 이야기는 늘 인간이 정해놓은 윤리나 법, ‘정상적’이라고 규정된 것과 정해진 길의 테두리를 벗어나 흐르기 마련이고 그럴 때 빛이 난다. 나는 “소설은 (늘 ‘나’가 중심인 이야기이므로) 인간을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서 읽지 않는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틀렸다. 이야기는 내가 나를 벗어나게 하는, 이 세상에 몇 없는 희망이다. 나라는 이의 정체성을 흩뜨리고, 송두리째 흔들고,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단면이 내 안에도 있음을 발견케 하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게 하는. 그걸 보게 하고, 그래서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의 가장 낮은 갈망을 깨우는 것. 인간을 비로소 신이 아닌 인간의 위치,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 그게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연기자는 자발적으로 그 속에 뛰어든다. 와, 이건 인간으로서의 폭이 넓어지는 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동시에 자신의 ‘좁은 이해’라는 틀이 와장-창! 깨지는 과정인 것이다. 와우.
소설의 언어는 그에 맞서 항상 요지를 초과하게 마련인 삶의 여백과 입증 불가능한 사연들을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한 인물에게 고유성을 되돌려준다. 이기호에게 소설이 윤리적인 장르라면, 그것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익명화된 개인들을 다시 고유명사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_ 책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김형중의 해설중⁴
당연히 말은 이렇게 청산유수여도 실전은 다르다. 경이로운 건 경이로운 거고 내가 연기하는 건 또 다른 일이다. 대본을 분석해놓는 것과 분석한 대본을 구현할 수 있느냐가 완전히 다른 일인 것처럼. 아, 우습다, 후후. 만화에 나오는 동그란 안경 쓰고 말만 잘하는 아이 같았다 지금.
나는 아직 대본에 숨어있는 배경 상황과 인물들의 특징조차 잘 잡아내지 못하는 수준의 초보다. 이런 내 빈약한 이해로 막연히 연기를 할 땐 대본의 상황과 가장 비슷했던 내 경험에 빗대어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연기는 나 자신을 벗어나지 못해서 아주 자주, 그저 내가 나를 재연하는 꼴이 된다. 어느 날은 연기를 다 끝내고 나서야 깨달은 적도 있다. 딸의 수술을 앞두고 술만 먹는 남편에게 모진 소리를 하는 아내 역이었는데, 나는 전에 매우 모지리인 남편을 뒀던 적이 있는지라 더더욱 모진 소리를 했다. 그런데 극을 마치고서야 알았다. 아내도, 남편도, 딸의 수술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글자로 써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했다.
"어? 선생님…. 이 여자… 자기를 탓하고 있네요?"
내 두 눈 위에 달린 눈썹들은 당황스러운 내 마음을 극대화하는 위치에 가서 섰고,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충.격. 이때부턴 완전히 상황이 달라지는 거다. 어떻게 달라지냐면… 어려워진다. 미궁에 빠진다. 허우적댄다. 확신 없이 어물쩍댄다. 그 캐릭터가 내가 아니라는 것만 선명해진다.
난 그날 좀 무서워졌다. 누군가를 나라는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하는 내 애씀이 상대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남들 앞에서 발연기를 해 놓고 창피한 것을 넘어서 본질적으로는 끔찍한 일이었다. 뭐, 연기야 내가 어디 가서 할 것도 아니고 가상의 인물일 뿐이지만, 실제의 내 세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거다. 인간이란 자신의 이해 안에 모든 것을 축소해 넣어야만 가까스로 살 수 있는 존재들이고, 나도 그런 인간 중 하나이지만, 살아있는 누군가를 앞에 두고서 그저 ‘헤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내 이해 안에만 가둔 적이 얼마나 많을지 소름이 돋았다. 물론 누군가의 이야기 앞에서 그것을 나의 이해 안으로 갖다 놓으려는 노력 자체가 숭고하고, 이 세상은 그것조차 절실하리만치 필요한 곳이지만, 언젠가 나를 앞에 두고 자꾸만 자신이 믿는 종교의 언어로 나를 정의하고 정리하던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우리 사이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암시하는 감각이었다. 그와 나 사이엔, 일단은 어떤 혼돈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앞에 두고 일단은 헤맸어야만 했다.
혼돈의 발연기. 캐릭터와 나는 물과 기름처럼 떠 있고, 늘 낯설고, ‘정말 이 사람이 이런 태도로 말할까?’ 확신이 없다. 내 발연기는 바로 여기서 나오고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헤매기만 할테다. 그리고, 내 인생에 나타난 사람들에 대한 창백하고 여지없는 이해…. 나는 살아 있는 누군가를 앞에 두고 얼마나 헤매고 있는가?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매일 만나는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헤매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다 어느 날 한순간, 어떤 찰나에 그 캐릭터를,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경험을 꼭 해보고 싶다. 또다시 혼돈 속으로 사라질, 그래야 할, 그 구원과 같은 순간을 기다린다.
*매주 화/목 나타납니다. 성-우로-드
¹ KBS 라디오 순수창작문예 오디오 드라마 / 토 18:10~19:00, 일 16:10~17:00
KBS 라디오 드라마로 만나는 한국 문학 오디오 북 / 일 18:10~19:00
² 1974년 초부터 방송된 문화방송의 어린이 라디오 연속극 《태권 동자 마루치》. 이후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위키백과.
³ 정말 그랬을까?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김연수 지음,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⁴ 이기호 지음,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문학동네, 2018
'대개는 어수선 > 성우로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낭독의 효용 (0) | 2020.08.20 |
---|---|
4-1. 대본이라는 거울 (1) | 2020.08.18 |
2. 문장과 문장 사이 (0) | 2020.08.11 |
1. 찾았다! 내 뼈를 묻을 곳 (0) | 2020.08.06 |
뿜빰뿜빰! INTRO (0) | 2020.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