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가 죽었다. 늦은 밤이었다. 그때 나는 이불 위에 누워 금세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이 일렁이는 파도가 되어 정혜를 끌어안고, 정혜가 고요한 바닷속에서 비로소 평온함에 잠겼다. 이야기의 끝은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슬그머니 이불 속을 빠져나온 나는 작은 등을 하나 켜고 바닥에 엎드려 내가 본 것을 받아 적는다. 죽은 그 애의 이름은 정혜定惠, 정해진 은혜. 나는 그걸 단번에 알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 애는 그냥 정혜였다.
불을 끄고 누우면 이런저런 목소리들이 들려와 잠을 설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그 목소리들은 어둠 속에서야 말할 자리를 찾았다는 듯 선명하게 입을 열곤 했다. 보통 나는 그런 목소리를 듣다가 듣다가, 못 들은 척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정혜의 이야기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날은 그걸 그저 지나가는 목소리로 여길 수 없었다. 내가 이름을 알아버린 그 애가 죽었으니, 나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물속을 찾은 정혜를 생각하며 그 애의 죽음을 적어 내려갔다.
귀가 아픈 정혜. '귀가 씻겨 내려가고 마음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솟아나게 하는 말' 같은 건 없는 세상에 사는 정혜. '그건 이래서 이런 거고, 저런 거래서 저런 것이다, 이것은 옳지만 그것은 그르다, 그렇게 하면 성공하고 아니면 망하지.' 부피도 무게도 없이 먼지처럼 들러붙기만 하는 말이 공기 중에 가득하다. 종교라고 다르지 않다. 같은 방식의 말이 신의 권위까지 입었으니 좀 더 노골적인 욕망이 드러난다. 일의 결과에는 언제나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누군가의 죄 아니면 복. 이런 쉬운 공식이 삶을 담아낼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정혜는 안다. 그러나 정혜 주위의 신실하다는 사람들조차도 이유 없는 결과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내 죄"라고 엎드려 우는 편을 택한다. 정혜는 의아하다. 그리고 역시나 자신의 고통에도 쏟아지는 '너를 향한 신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축복, '네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느냐'라는 의심의 뉘앙스 사이에서 숨이 막힌다. 그런 쉬운 말들은 신의 멱살을 쥐어 흔드는 인간의 본성, 민낯, 원죄에 다름 아니다. 정혜가 바다를 찾은 건 그 때문이다. 그 말들을 피해서다. 정혜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물 속에서야 비로소 깊은 숨을 쉰다, 해변에서 발견된다, 사람들은 정혜의 죽음이 자살인지 아닌지, 그게 죄인지 아닌지에 몰두한다…. 나는 A5 사이즈의 아담한 노트 한 면에 열 몇 줄의 이야기를 끄적인 뒤에야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정혜에게 엄마가 생기고, 이모가 생기고, 이제는 같이 살지 않는 아빠와 조부모, 친구가 생겼다. 내가 그 이야기를 놓지 못한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 중 몇몇은 분명히 나를 빼닮았지만 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 채 며칠을 썼다. 그리고 그 며칠을 보내고서야 내가 등장인물들의 삶에 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남편의 패악질로 고통받던 나, ‘남편의 모든 것은 아내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라는 말을 듣는 나,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당당한 주장 앞에 떠는 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스스로 물을 때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떠올리는 내가 그 속에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전혀 몰랐던 것…. 내가 쓰는 것은 소설도 진술서도 아닌 그사이의 어떤 것이었다. 나는 내가 겪은 것 이상을 써내지 못하는 나의 아마추어틱한 모습에 웃고, 딱 거기까지만 쓰고 싶어 하는 내 정직함을 조롱해가며 왜인지 멈추지 못하고 썼다.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들이 그저 한풀이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나는 빠르고 헉헉대는 문장들을 쏟아놓고, 왜 정혜와 등장인물들이 내가 겪은 일을 그대로 가져와 겪고 있는 것인지 미안해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내 상황에 또다시 놓이는 이들을 만들어 내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면 속이 좀 풀리나. 나는, 이 소설을 왜 쓰고 있나. 사흘이 지나서야 물었다. 써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럴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무난한 사람으로 길러졌으므로 나를 표현할 말은 배우지 못하고 나를 둘러싼 말들에만 익숙했다. 그런 내게 고통 뒤의 고립은 정해진 일이었다. 남편과의 일을 진술하는 내 말은 말이 아닌 것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몸이 떨렸고, 식은땀을 흘렸으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런 것들은 말이 아니다. 말해졌으나 말해지지 않았고, 말해졌으나 들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고통은 낫지 않은 채 묻혔다. 사람들은 가끔 그런 나를 힘들어했다.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그건 힘든 일이다. 차라리 내가 고통받을지언정... 말도 아닌 말 밑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 빙산 같은 아픔을 가늠하고 앉아있는 짓 같은 건, 너무 슬퍼서 할 짓이 못 된다. 우린 전부 그런 사람들이다.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쓰는 정혜의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무언가 토해내고자 애쓰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단어들 속에 내 울음이 숨어 있었다. '그', '모든', '늘', '사람들'. 지목하고 강조하고 일반화하여 나를 변호하고픈 욕구가 핏자국처럼 묻어있다. 이 단어들은 아주 습관적으로 문장 사이에 끼어있었다. 나는 내가 너무 자주 쓰는 저 단어들을 지우고 또 지웠다. 지워도 지워도 흔적은 남아있는 핏자국 위에 부드러운 단어를 골라 덧입혔다. 단언하기를 꺼렸다. 소설임에도 반론이 있을 만한 문장 앞에서 주춤했다. 'A다'라고 썼다가, '그렇다고 B를 긍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같은 말을 붙이고 싶어 했다. 문장이 좀 더 씹을 만한, 소화되기 쉬운 것이 되기를 바라고 불안해했다. 내가 쓰는 글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고통이 결코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깎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직도 받아들여질 만한 고통, 그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정혜는 내게서 남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정혜는 죽지 못하게 되었다. 그건 정혜에게 엄마와 이모가 생기고, 그들이 정혜를 아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으나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들을 등장시킨 것은 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이들을 움직이는 게 내가 아니게 되었다. 인물들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생소하고 낯선 느낌이 들어 외로워졌다. 분명 내 이야기인데, 내 것을 가지고 쓰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남이 되었다. 어느새 이들과 나 사이에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생겨버렸다. 그때부터는 내가 쓰는 것이 소설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내 고통'이었던 것을 사는 이들의 고통이, 내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의 고통이 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어쩌면 나는 남의 고통 따위는 공감은커녕 이해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버린 이들의 새로운 고통에 알 수 없는 혐오감까지 들었다. 피하고 싶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감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동안에는 살아있기를 포기했기에 숨 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내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을 진작에 포기했고, 그 일들이 내가 지은 죄 때문,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욕심을 버렸고, 모든 아픔에 나를 향한 신의 뜻이 있다는 낙관의 지옥, 온통 '나'로만 가득한 그 지옥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이혼 소송을 포기했다. 내 고통은 법이라는 얄팍한 그릇 안에 담기지 않을 것이고, 그 얄팍한 그릇에 담긴 몇 조각의 고통 또한 증명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향한 설명을, 이 세상에 대한 납득과 이해를 포기했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겨우 포기했던 그것들을 정혜의 이야기 몇 줄로, 겁도 없이 다시 시작해버린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목이며 어깨, 팔의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내가 아니게 된 정혜 엄마의 고통에 가까이 가보고자 이혼의 언저리에 쓰인 일기들을 들춰본 다음 날엔 몸살을 앓았다. 나는 이제는 나조차 공감하고 싶지 않은 나의 옛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다시 쓰려 하고 있었고, 내 몸은 그걸 거부하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날이 잦아졌다. 이제는 내 이야기 같지도 않은 오래된 장면을 다시 겪고 기분 나빠하며 꿈에서 깬다. 그리고 그 일을 겪은 게 바로 나였음을 억지로 기억해내버린다. 나는 겨우 낫고 있다 여겼는데… 무언가가 정혜를 불러와 나를 깨웠다. 나는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들이 아직 내 속에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금의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다시는 그때의 내가 될 수 없다는 것까지 알아버리고 만다. 그 고통을 당한 것은 나였지만 나조차도 다시 그때의 내가 되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냥 묻어둘까? 다시 그 때로 되짚어 돌아가는 건 자살행위와 같다, 그저 다 잊히도록 모른 척 살아가는 게 나를 위해 더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주 나중에는 없었던 일처럼 기억될지도 모른다. 나는 좀처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책상 앞에 앉아서도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악이라고는 다 빠져버린 맹숭맹숭한 글을 쓰면서도 그랬다.
결국 나는 그때의 내가 되지도 못하고 지금의 정혜나 그 주변 인물도 되지 못하면서 어정쩡한 어딘가에 서서 글을 썼다.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 강박 같았다. 끝을 내겠다는. 욕심이었다. 지나간 한 시절을 어서 지나간 것으로 만들고 덮어버리고 싶은 욕심. 지나간 것이 어떤 의미라도 가지고서, 어떤 매듭이라도 지어져 끝이라는 것이 나버리길. 정말 지나간 것이 되어버리길. 나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곤 견디지 못하는 등장인물을 하나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내가 그 짓거리를 한참 해대고 있었다. 결국에 실패할 작업임을 알면서도 놓지 못했다. 나는 끔찍하게 살아있었다. 끔찍하게도, 살고 싶어 용을 썼다. ‘말해지지 못하고 들려지지 않는 말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이 오래된 질문이 글을 쓰는 동안 되살아나 글을 마치기까지 나를 괴롭혔지만 결국 풀리지 않았다.
정해진 은혜, 그러니까 운명처럼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 처음 정혜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날, 나는 맨 마지막 줄 즈음 정혜의 죽음을 그려 넣으며 정혜에게 정해진 은혜라는 게 있다면 그건 죽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게 자살인지 아닌지를 놓고 그 자살이라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인지 아닌지를 놓고 싸울 때, 나는 신이 있다면, 그는 늘 귀가 아프고 속이 시끄러워 고통받는 정혜에게 '그 정도의 선물은 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런 존재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했다. 고요한 바닷속에서 깊은숨을 한 번이라도 쉬어 보는 것. 정혜의 생에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그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혜는 결국 죽지 못했다. 그리고 정혜의 이름은 200자 원고지 900매를 채우는 내내 정혜였다.
죽음이 아니라면 정혜에게 정해진 은혜는 무엇이었을까. 그걸 내가 모르면 어떡하나… 멋쩍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나는 아직 모른다. 그저 이 실패한 소설은 언젠가의 나에게 발견되어 아주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로 '남의 것'이 되어 내게 올 것이다. 그게 무서우리만치 소름 끼치는 은혜라는 것만, 나는 알고 있다.
20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