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만약에 누군가가 언니에게 한 달에 백만 원씩 줄 테니까 이 깜깜 산에 와서 살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당연히 살아야지."
"인터넷도 없고, 재밌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없으면 고맙지."
"그러면… 바선생이 나오면? 엄청 큰 게 막 나와."
"그럼 안 하지."
"언니. 그러면, 만약에 한 달에 천만 원씩 주면?"
"……."
"그런데 잡아주는 사람도 있어. 그러면 어떡할 거야?"
"하루에 몇 마리나 나오는데?"
"일주일에 한 마리 정도?"
"그러며언…."
"그런데, 그 잡아주는 사람이 매번 잡아줄 때마다 엄청 생색을 내고, 언니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티를 팍팍 내. 그러면 어떡할래?"
"……."
"언니. 그러면, 만약에 일 년에 일억을 주고, 바선생 잡아주는 사람도 있어. 일주일에 한 마리고. 그런데 그 바선생이 언니 가방에도 막 들어갔다가 나오고 음식을 탐해. 그러면 어떡할 거야?"
"…그만해."
하염없이 돌아가는 '바선생 시뮬레이션.' 우리가 탄 버스도 뱅글뱅글 돌다시피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키나발루산 등성이를 굽이굽이 도는 동안 나는 약간 멀미가 나 동생을 바라보지는 못하고, 앞 좌석 머리 받침대에 머리를 박은 채 시험에 임했다. 끝도 없는 시뮬레이션이었다. 동생은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그것은 바선생, 바선생이 내 청정구역에 드나드는 것 혹은 서울의 우리 집까지 따라오는 것, 내가 먹을 음식을 먼저 맛보는 것, 그리고 바선생을 잡아주는 사람이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 동생은 내가 민감하게 여기는 것 또한 꿰뚫고 있다. 고정수입에 마음이 약해지는 나를. 처음에 등장했던 '인터넷이 없는 것' 정도는 나를 저 시뮬레이션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할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누가 정말 그 돈을 준대?)
동생의 방문에 맞추어 바선생이 등장한 것은 조금 유감스럽지만, 사실 나에겐 폭죽을 터뜨리고 기뻐할 만큼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동생은 Sister's Keeper. 물론 그에게 Sister는 나 하나고, Keeping은 무엇으로부터? 바선생으로부터. 후후. 게다가 동생과의 동거는 꽤 할만하고 즐겁기까지 하다. 같은 모부, 같은 환경에서 어쨌거나 족히 27년을 살았다. 그 시간이 우리를 비슷한 인간으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우린 비슷한 종류의 청결에 대한 강박, 비슷한 정도의 식욕과 배고픔, 그리고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같은 장면에서 웃어 재끼고, 연민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동생은 집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고, 루시드 폴의 음악을 좋아하고, 오늘 아침 그의 새 앨범을 들으며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나는 이런 동생과 함께 있으면 늘 안심한다. 저 애와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둘이 함께라면 '무슨 일'을 '별것 아닌 일'로 만들 수 있다.
나는 저 애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게 좋다. 그 말이 왜인지 나를 우쭐하게 한다. 나이가 많은 걸 뽐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 애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내가 저 애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괜히 뿌듯해진다는 말이다. 한참 가위에 눌려 있다가 가까스로 깨어났을 때 "허어언니!" 교통카드를 안 가져왔는데 내가 저를 잊을까 봐 버스 계단 참에서 "어헌니!" 한 회에 10만 원이나 한다는 요리 교실을 너무나 듣고 싶은데, 아무래도 한 회에 너무 10만 원 일 때 "언니, 상의할 게 있는데." 이제는 나보다 키도 훌쩍 크고, 돈도 더 벌고, 두 마리 고양이와 남편을 거느린 생활을 하는 어엿한 독립인간인데다가, 무려 차를 몰아 직장에 다니고, 요가로 몸을 관리하는 어른이 된 동생. 그런 동생이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왠지 입안에 참깨를 몇 알 넣고 씹을 때처럼 고소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언니. 아빠를 이런 데 데려왔으면 좋아했을까?" 우리는 결국 석양 앞에서 아빠를 떠올렸다. 2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나버린 일이 우리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갑자기 아빠가 없어진 그 날을 떠올리면 누구든 먼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마음은 무덤덤해졌는데, 눈에선 주르륵 눈물이 쏟아진다. 아빠가 정말 좋은 곳에 갔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빠가 얼마나 놀랐을까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는 것이다.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놀랐을까…. 우리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더 생각할 줄 알게 되었고,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 또 그게 언제인지 모르니 늘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애석하게도 아빠는 우리가 아이의 마음을 가졌을 때 돌아가셨고, 우리는 아빠를 어른처럼 위해주지 못했다. 아빠는 딸들이 그렇게 많이 비행기를 타고 바다 밖을 나가는 동안 한 번도 한반도 남쪽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자기 몸을 데리고는 제주도 한 번 가는 것을 망설였으면서 우리를 비행기에 태워 이곳도 저곳도 보내 가며, 그게 자기가 가는 것인 양 흡족해했을 뿐이다.
"해산물을 좋아했겠지. 이 바닷가가 있는 도시에서 아빠는 물고기가 많아 행복했겠지. 해가 뜨거운 낮엔 하얀 메리야스랑 사각팬티만 입고, 침대에 누워서 배를 두드리며 하늘을 봤겠지. 맥주를 한 캔 땄겠지. 여기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이, 서울 우리 집 작은 창문의 조각난 하늘과는 달라 마음이 퍽 시원해졌겠지. 그러다, 그러다 시도 한 편 썼겠지."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 내가, 외식이랍시고 겨우 동네의 후질구레한 수산물 집에서 뜬금없는 한정식을 대접한 걸 후회할 때. 아빠를 방배동의 냉면집에 데려가 갈비도 없이 냉면만 먹인 것을 미안해할 때 "언니… 그런데… 아빠… 드실 만큼 드셨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건 저 애뿐이다. 한 일이라곤 아빠 속 썩게 한 것밖에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마다 "언니… 있지, 사람은 네 살 때 평생 할 효도를 다 한대. 언니 할 만큼 한 거야. 귀여웠잖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저 애 뿐이다. 나 때문에 속이 상해 우는 아빠를 안아줄 수 있었던 것도 저 애뿐이었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던 아빠를 꼭 안아준 것도 너뿐이었으므로… 아빠를 생각하면 언제든 눈물이 날 것 같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이도 너뿐이다. 나는 너에게 뭘 해 줄 수 있을까? "죽지나 마."라고 대답할 동생아.
P.S. 아참, 동생아, 네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지? "언니, 내가 돈을 모아 줄 테니까 언니 어디라도 나가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어떻게 여기서 더 살 수가 있어?" 라고. 지옥을 방불케 하는 결혼생활을 끝낸 나를 걱정하던 네가 "여기서 어떻게 더 살 수 있어?"라는 말을 해 주어 더 살아갈 힘이 생겼었어. 나는 이를 악물고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았고, 지금은 좀 턱이 아파 이를 덜 악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런 와중에 "돈을 모아 줄 테니까..."라는 말이 조금 효력을 잃은 것 같기도 해서 조금...? 다시 물어보기도 그렇고...?? 음... 내가 요즘 너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 내가... 너무 빨리... 회복을... 그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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