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나는 꼭 아이에게 무용이나 검도, 노래나 태권도 같은 것을 배우게 하고 싶다. 머리가 커지기 전에 그저 몸으로만 하는 일을 가르쳐 주고 싶다. 자기 몸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얼마만큼 힘이 셀 수 있는지, 어느 정도 범위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몸에 익히도록 하고 싶어서다. 아마 그러면 아이는 내면에 자신의 몸- 자기 존재의 감각을 또렷이 새기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런 걸 배운 아이는 아니었다. 내 생에서 몸의 감각을 마음껏 느끼고 사용해본 시기는 그나마 내가 사회의 눈치를 덜 보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였던 것 같다. 나는 내성적이고 움직임이 작은 아이였는데, 이 사회는 여자애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까지 여기니, 중학생이 되어 검도를 배우고 싶었던 내 소망이 우리 집에서 ‘쓸데없는 얘기’로 치부됐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머리만 커졌다.
정신과 의사 이즈미야 간지는 저작 <뿔을 가지고 살 권리>에서 “인간을 국가에 비유해보면 대개의 현대인은 ‘머리’가 독재자로 군림하는 전제국가”라고 했다. 이 말은 정말 맞다. 내가 그 살아있는 증거니까. 나는 감각보다 머리를 쓰고, 머리와 몸의 비율이 적어도 9:1에는 달할 만큼 불균형한 사람이다. 몸이 죽도록 아파지기 전까지 굴리기만 한 전적이 있고, “힘들어”, “하고 싶어”, “좋아”, “싫어”보다, “해야 돼”, “이게 맞나?”, “그건 틀려”, “참자”가 강화된 사람인지라, 몸과 마음과 생각이 아주 자주 따로 놀기 일쑤다. 주로 생각이 나머지를 억지로 끌고 가는 독재를 일삼는다. 생각은 “아프다”는 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흘려듣는 경향이 있고, 내 감정을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거나 그 감정이 무엇인지 드러나도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거의 매번 내 감정에 대한 평가(대부분의 경우엔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심)를 덕지덕지 붙인다. “내가 이상한 거야?”, “내가 미친 거야?” 내 감정인데 남에게 묻는다. 감정적인 것은 의심받는 세상을 살면서, 생각이 본능적으로 주류를 따라 그 의심을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는 감정에 북받쳐 ‘앞뒤 생각 없이 퍼붓는’ 대본들에서 자꾸 주춤한다. 나도 모르게 어떻게든 부드럽게 말을 포장한다. 대사를 바꿀 수는 없으니 말 끝을 늘린다든지, 설득하는 톤으로 바꾸어 ‘폭발’이 아닌 ‘호소’를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해준아, 네 감정에 예의 차리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늘 폭발적인 감정으로 연기하듯 살 수는 없는 거겠지만, 선생님의 지적은 너무나 정확해서 내 머리를 때렸다. 띵- 했다. 이 조언이 내 삶을 관통해버렸다. ‘나는 자꾸 내 감정을 포장하고 예의를 차리는구나’, ‘이것 역시 내 감정인데.’ 나는 남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 한 발 숙이고 들어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받아들여질 만한 감정으로 순화시켜 내 보이고, 관계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 선까지만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 감정은 내 감정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상대의 몫일 때가 훨씬 더 많은데도 말이다.
“해준이는… 사탄의 인형 같아. 예쁜 인형이라 샀는데, 알고 보니 사탄인 거 있지.”
첫 직장의 동기 인턴 한 명이 그런 말을 했었더랬지. 그때 나는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손뼉을 쳐 줬다. “정답!” 내 인생에 길이 남을 명언이고, 내 마음에 찰떡같이 달라붙은 말이었다. 사탄의 인형이라… 그는 정확하게 본 것이다. 내 내면에 잠자고 있는 또라이와 아직 폭발하지 못한 분노를. 그러나 내면이 돌아있는 것과 그것을 몸 밖으로 표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말했듯이, 나는 머리가 크다. 나는 큰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살았다. 사실 내가 그럴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성우학원을 다니며 가장 기쁜 건, 내가 사탄으로서의 역량을 맘껏 발휘… 는 아니고, 진지하게 목소리에만 집중하는 그 순간엔 온전히 ‘몸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기대와 기준에 열심히 부응하던 머리의 사람을 잠시나마 벗어나, 내 몸을 가지고 ‘얼마만큼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아가고 있다. 성량도 성량이지만 그것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캐릭터 연기를 할 때면 그의 성격에 맞춰 뱃심 두둑이 주고 진한 소리도 뱉어 보고, 악역 캐릭터에는 날카로운 에너지를 넣어 소리를 내 보는 작업 자체가 나의 ‘가동성 범위’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엔돌핀이 돈다. 나는 단지 내성적이고, 차분하고, 묵묵하고, 꼼꼼한 사람을 벗어나 내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모습들을 흉내라도 내 보며 확인한다. 나는 괄괄하고, 덜렁대며, 즉흥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일 수도 있다. 흉내라도 내 보면서 말이다.
“큰 소리로 말해!”, “큰 소리로!”
학창 시절 내내 받은 이 지적 때문에 나는 내 작은 목소리가 늘 스트레스였다. 그런 내가 성우학원에서 받은 최고의 칭찬은 “해준아, 난 네가 못 지를 줄 알았어!” 선생님은 내 첫인상을 보고 내가 큰 소리를 못 낼 거라고 생각하셨단다. 그러나 나는 질렀다. 질러버렸다. 되더라! 나도 소리 지르고 악쓸 수 있더라. 크게 화낼 수 있는 사람이더라. 이제 나는 누가 나를 위협하거나, 무례한 아저씨가 조금이라도 거들먹거린다 치면 (좀 무섭긴 하겠지만) 당당하고, 낮고, 친절하지 않은 큰 소리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기력이 늘면 눈에서 레이저도 좀 쏠 수 있을 듯. 후후. 나는 내가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해 본 적 있다는 게, 언제든 필요시에 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해 보는 게 중요하다. 해 봤다는 거. 해 보니까 됐었다는 경험이 중요하다. 호통도, 쳐 본 사람이 친다.
-따라서 가끔 "으악!"하고 괴성을 지르며 이런저런 것들을 버리거나 부수는 것은 꽉 막힌 현재 상황을 초기화하는 방법으로 의외로 나쁘지 않다.
-힘들어지면 참지 말고 울음을 터뜨리거나 소리를 빽 지르며 손발을 버둥거려보자.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는 휴대전화와 컴퓨터 전원을 끄고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먹은 후 방에 틀어박혀 실컷 잠을 자자. 다른 사람, 회사, 책임과 의무 같은 것은 다 내던지자. 하기 싫은 일과 성가신 일은 모조리 내팽개치고, 좋아하는 일만 하며 지내자. 시간을 계속해서 낭비하자.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에서 적었듯이 오열하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손발을 버둥거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_pha, <하지 않을 일 리스트> 중*
대충 사는 법을 다룬 이 책은 인생의 중요한 팁들을 많이 알려준다. 그런데 으악! 하는 괴성도, 소리를 빽! 지르는 것도, 오열하고 손발을 버둥거리는 것도 해 봐야 할 수 있다. 힘들 때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니까, 점점 더 큰 소리로, 점점 더 손발을 멀리 뻗어 버둥대는 것을 평소에 연습해두자, 우리.
연습, 연습, 연습이 필요하다! 한 번에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고 있거나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 소심한 소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가수 강민경 씨도 차 뚜껑을 열고 달리는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익룡 소리를 내고 싶어서 낸 것이 아닐 것이다. 큰 소리를 낸다는 건 참 눈치 보이는 일이다. 문명화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사는 인간일수록 말이다. 나도 깔깔깔 웃는 연습 같은 걸 하다 보면 옆집 남자가 “시-끄-러-워!”라고 하기 때문에, 연습실 방을 하나 빌렸다. 그러나 내 돈 주고 빌려놓은 연습실에서도 “히이이야아아앗!” “누!가!! 내!파이!! 훔!쳤!어!!!!!”같은 걸 외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쪼그라들고, 방문 앞에 누가 서성거리는 그림자만 비춰도 내게 항의하러 온 걸까 봐 간이 콩알 만해진다. 옆 방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처럼 나도 내 목소리 가지고 하는 연습인데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학원 친구 한 명은 옆 방 오보에가 "웃는 소리 내지 말라"고 경고한 뒤로, 억울해서 찔끔 눈물은 날지언정 찍소리도 못 내게 됐다고 하던데… 난 그 마음 백번 이해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처럼 학원을 다니는 게 아닌 이상에야 연습실까지 빌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사람이, 특히 여성들이 감정에 예의 차리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 마음은 간절하다. 각자가 가진 힘을 억누르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지를 수 있는 만큼은 질러 봤으면 좋겠다. 정 이웃들 눈치가 보이면 정말로 딱 하루만 연습실을 빌려보라. 하고 싶었던 말들을 최대한 위엄 있고 큰소리로 해보고, 더 단단하게 만들어보라.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를 찾아 몸에 잘 새겨두자. 해본 것이, 언젠가 나올 것이다.
나는 나를 배워가고 있다. 배에서 눌려 올라오는 호흡이 목을 지나 코로 빠져나가는 느낌, 소리를 코의 앞쪽에 보내서 찡찡 나는 소리와 입천장에 닿을 때의 편안한 소리와 목 안쪽을 울려 내는 낮은 소리의 각기 다름을 감각하는 것. 그것들이 다 내 소리고, 내가 ‘이런 느낌도 나는 소릴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 내 안에서 꺼낼 수 있는 게 더 많이 있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나는 이제야, 내 존재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아가고 있다.
* 파(pha)지음 이연승 옮김, 하지 않을 일 리스트, 박하, 2017
* 매주 화/목 나타납니다. 성-우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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