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다리가 벌겋게 일어나고 가렵다. 욥처럼 기왓장으로 긁어야 끝나는 건가. 며칠 두고 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피부과를 찾았다. 아마 햇빛을 많이 쬐어서 그런 거거나, 며칠 전 만났던 대형견들한테서 뭔가 가렵게 하는 게 옮은 걸 거야. 나름대로 내린 두 가지의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갔다. "인터넷 켜서 '옴'이라고 쳐 보세요. 증상들 다 나와 있어요." 의사는 멀-찍이 떨어져서 저렇게 말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의사가 나를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로 앉아 있거나 무언가에 집중하는 직업의 특성상 거북목일 가능성이 높은 그의 얼굴이 목 뒤로 주욱 빠져 있었다. "햇빛 때문이면 얼굴도 그래야 하는 데 아니잖아요?" 내가 햇빛이 아닌 다음 의심을 제기하자, 그는 이렇게 간단히 답변했다. 그리고 내 진료는 끝났다.
하! 아니, 내가 인터넷 찾아서 스스로 진단 내릴 거면 병원에는 왜 왔대? 자세히 보지도 않고, 지금 내가 자문자답해서 진료 받은 거야? 저기여, 선생님, 선생님은 의사가 아니라 처방 기계셨던 거예요? 내 팔이 어떤지, 다리는 어떤지 보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셨잖아요! 나는 내가 지금 병원에 온 것이 맞나 의아해서 진료실을 떠나지 못하고 눈을 끔벅였다. 킁. 곧 부아가 치밀었다. 나를 쳐다보지 않는 의사를 향해 팔을 보여주며 "그러니까. 이게. 개들한테서. 진드기가. 옮았다는. 그 말씀이시죠?"라고 증상을 보여줬다. 팔이 부아의 리듬을 타고 위아래로 출렁였다. 보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다른 곳을 보며 "인터넷 찾아보시면 알아요."라고 무한한 지식과 정보의 세계로 내 등을 떠밀었다. 그래요, 세상이 좋네요 선생님.
질병에 걸린다는 것은 자기 삶의 통제권을 상실하는 경험이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주체적 삶을 회복하려고 찾는 병원에서, 통증이나 질병이 아니라 의사나 시스템 때문에 또 다른 무력감과 통제권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히 의사가 환자에게 보다 친절한 말투로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환자의 건강은 수술대와 약, 세포의 수치에만 있지 않다. 나는 질병에 점유되지 않은 삶, 스스로 계획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기 위해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다.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219쪽
그 이후에도 내 몸은 한 달씩이나 '뭔가 지금 네가 먹는 것이 / 자는 곳이 / 만지는 것이 나와 맞지 않아'고 소리쳤는데, 나는 그 사인을 어떻게 들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한 달 내내 끊임없이 내게 약만 멕이며 시간을 보냈다. 뭐였을까, 뭐가 나를 그렇게 가렵게 했을까? 약을 먹고 있을 땐 알레르기 반응이 크게 나오지 않아 한 달을 검사도 하지 못한 채, 긁고, 잠에서 깨고, 약을 먹고, 연고를 발랐다. 아, 당연히 저 병원에는 첫 진료 이후로는 가지 않았다.
전국의 의사 슨생님들, 명의가 되고 싶으신가요? 제가 장담컨대 선생님을 찾아온 환자에게 설명만 조금 더 해주셔도 '명의' 소리 들으실 겁니다. 제가 평생을 살며 기억하는 명의들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더라도 '조금 더'의 설명을 해주는 사람들이었거든요.
나는 이 몸을 살아가고 있다고요.
의사들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어서겠지만, 총체적으로 연결된 내 몸을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료 전문인은 의사지만, 결국 내 몸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두려웠다.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26쪽
저 극단적인 병원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뭐였을까? '네가 앓고 있는 병은 내가 안 들어봐도 뻔히 알고 있으니 넌 잔말 말고 약이나 받아 가라'는 의사를 만나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선생님, 남들이 다 같이 앓고 있는 병이라고 해도 내 몸 아픈 건 나만 느껴요. 지금 아픈 이 아픔은 나만 안다구요. 선생님이 하루에 똑같은 병증을 가진 환자 백 명을 만나면, 제 증상을 살피고 제 눈을 보고 제 말을 듣기조차 짜증이 나겠지만요, 저는 이 몸을 살고 있다구요. 이 몸은 하루 24시간 저에게 붙어 있다구요. 나는, 이 몸이라구요!
그래, 나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대우를 받고 싶은 거다. 의사를 만나는 시간은 기껏해야 1~2분이지만, 아픈 나는 그 짧은 시간조차 절실하다. 나는 바르거나 처넣을 무언가를 얻고 끝나는 '몸뚱이'가 아니라, 그 1~2분 외에도 하루 23시간 58~59분을 아픔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걸, 의사 선생님이 느껴 줬으면 좋겠다. 느껴 줬으면 좋겠다. 같이 아프자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걸 감각해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건 내가 진료실을 나가자마자 죽는 게 아닌 이상에야 당연히 알 거니까.
선생님, 제가 그 1~2분을 위해 병원을 찾는 이유는요. 선생님을 거치지 않고서야 약을 주지 않을 걸 아니까도 있지만, 예, 예 솔직하게 그렇지만, 그보다 알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줘야 하는지 말이에요. 아픈 몸을 사는 동안 내가 내 몸을, 그러니까 나 자신을 어떻게 돌봐줘야 하는지 말이에요. 선생님이 허공을 바라보고 이중 턱이 생기도록 얼굴을 목 뒤로 빼며 입에서 처방전을 뽑아내는 걸 보러 병원에 가기는 싫다구요.
선생님, 부디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무섭게도 의사가 나를 그냥 '몸뚱이'로 대하는지, 그 몸을 '사는 사람'으로 대하는지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더 무섭게도 의사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아픈 사람은 의사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이해할만하지만 그래도 잘못됐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면서 아픈 사람은 대가를 치룬다. 바로 자기 존재가 그 몸의 일부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_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28쪽
'고작' 감기로 의료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병원을 찾았을 때, 그 선생님은 내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의자를 돌려 몸과 얼굴을 내게 향한 채로. 명의시다. 감기가 왜 오는 것인지, 어떻게 오는 것이니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것, 가래는 기침을 할 때 목에 상처가 나서 생기는 것이니 목이 간지러워도 억지로는 기침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 (와! 나 이거 29년 살면서 선생님께 처음 배웠어요), 물을 많이 마시고 건조하지 않게 해 주라는 것…. '아니, 잠깐, 내 감기가 이렇게 중요한 것인가?' 의아해질 만큼 이 당연한 얘기를 해주는 선생님은, 분명히 내가 이 진료실을 떠나 살아갈 하루 23시간 45분(!)의 삶을 내다보고 계셨다. 사실 나는 그런 걸 바라고 간 것은 아니었다. 으레 내 평생 그랬듯이 약이나 처방받고 나올 거라 생각하고 간 병원이었다.
그 병원에서 나온 나는 '고작' 감기에 걸린 나를 정성껏 돌보기 시작했다. 기침이 날 때 기침은 기침대로 나게 내버려 두고 인상 쓰며 다른 일을 하던 내가 아니었다. 잠깐 시간을 들여 억지로는 기침을 하지 않으려 애쓰고, 따뜻한 물을 마신 뒤 다시 일했다. 조금 피곤하게 나를 몰아세웠던 지난 몇 주를 생각해 봤다. 아마 그래서 감기가 온 것일 테지. 그래서 그 주엔 잠이 오면 얼른 이불을 덮고 내 몸을 '뉘였다.' 내 몸은 지금 아프니까. 잘해주자. 하면서.
그러니까 아무래도 의사 선생님이 '선생님'인 이유는 병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고쳐줄 수 있는 지식이 있어서 기도 하지만, 내가 몸을 가진 존재라는 걸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시시때때로 잊어버리니까. 아프지 않으면 그 몸 자체가 나라는걸, 그래서 잘 돌봐줘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살아가니까. 선생님은 그걸 일깨워줄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다. 나는 몸에 대해 무지하다. 특히 나같이 머리만 큰 사람은, 몸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몸이 없어도 살 사람처럼 굴다가, 몸이 아프면 몸을 탓하는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해왔다. 그러니 의사 선생님, 부디 몸에 대해 무지하게 살아온 저에게 선생님이 되어 주세요. 아마 저도 몇 번은 선생님께 가르쳐드릴 것이 있을 거예요. 몸에 대해 무지해도, 아픔은 이렇게나 잘 감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연 위에 놓인 이 세계에서 삶은 부서지기 쉬운 한 조각의 행운 같은 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 귀하다. 아픈 사람들은 이미 아픔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이 질병이 무엇인지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이 있느냐다. 이는 결국 삶이 무엇인지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_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201쪽
20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