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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어수선

무병요절의 꿈 2

 

선생님, 저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걸까요?

  나는 활동가다. 뭐라 말할까, 일종의 백수 취급받는 직업군의 하나다. 변호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하릴없이 이상을 좇으며 '봉사활동'을 직업으로 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런... 어른들께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 "그 봉사활동은 언제까지 할 거니?", "비영리 말고 영리에 다녀야지" 등의 말을 듣는, 백수네. 뭐라 정의 내리기도 까다롭고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뭘 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단체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하고, 그 내용 중에서 법적인 절차에 반영할 수 있는 것들을 추린다. 내용을 보완할 자료를 찾고, 절차의 신청을 지원하고, 이어지는 이의 신청과 소송 절차를 돕는다. 내담자에게 아이가 있다면, 절차 가운데 아이들이 아이들로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육비, 양육비, 교육비를 지원하는 단체와 연결한다. 그 중간 행정을 처리하고,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방문하여 살펴보고, 보고서를 쓴다. 정부의 관련 부서가 하는 일들을 모니터하고, 통계 자료를 받아 정리해서 시민사회에 알린다. 내담자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캠페인을 기획하고, 거기 사용할 브로슈어를 만들고, 국회의원들에게 알릴 내용을 따로 정리하고, 또 브로슈어를 만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유엔에서 나온다는 보고관들이 읽을 자료를 만들었다. 거리에 부스를 열고, 브로슈어를 나눠주고, 플래카드를 흔들고, 강연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만나 질문하고 답했다. 단체의 살림을 꾸리고, 숫자를 만졌고, 운영위원회를 열고, 총회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나는 이 일이 좋았다. 내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의감에 딱 들어맞는 일이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라는 외면하고 싶지 않은 내 인생의 질문엔 아직 답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내가 사는 현실은 내가 만드는 거라는 믿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이 일은 내가 하고 싶다는 애정, 제도와 삶 사이의 간극에서 중재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고 가치 있다는 생각,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살고 싶다는 욕심. 이것들이 나를 계속 이 비영리, 공익 분야에 머물게 했다.

 

선생님,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일 생각이 멈춰지지를 않고, 잠도 오지 않아요. 복귀하자마자 다시 시작됐어요. 사무실에 들어가면 아침부터 초조하고 불안해요. 괴로워요. 일이 이렇게 제 모든 생각을 사로잡으면, 일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낮은 자존감이 일상생활을 지배해버려요.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선생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걸까요? _2월 5일, 상담 선생님께 쓴 일기

 

  이 일은 나를 기쁘게 했고, 슬프게 했고, 아프게 한다. 성취 없는 과정만이 계속되는 지리함, 늘 부족하다는 채울 수 없는 목마름, 직함 없이는 신뢰받을 수 없는 현실, 그러니 계속해서 내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 결국 활동가라는 존재 자체의 애매모호함. 사람들은 결국 변호사를 찾고, 변호사와 교수에게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무람한 행동을 활동가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단체의 빠듯한 살림에 하나부터 열까지를 도맡아 하는데, 책임져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이 각각의 것들이 각각의 화살이 되어 나를 한 번씩, 한 번씩 찔렀고 나는 병이 났다. 내가 병이 난 건 저 중 어느 하나 때문이 아니다. 저것 하나하나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별것 아니었다.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마음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병이 났다. 어느 순간 일이 기쁘지 않았다. 이 일이 가진 '의미'만이 가느다란 실이 되어 나를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더 못할 건 뭐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었다.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오래 하는 사람은 없는 일이다. 환경 자체가 그렇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사회적 인정마저 없으니, 이건 질 싸움이다. 2~3년 활동하던 사람들이 삶의 대안을 찾아 로스쿨로, 대학원으로, 국제기구로 줄줄이 자신의 길을 나섰다. 변호사가 아닌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손에 꼽힌다. 그 와중에 이렇게 저렇게 6~7년씩이나 이러고 있는 나는 동료와 "우린 미련해서 남아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이 자꾸 커졌다. 활동가라고는 자체 기금으로 달랑 두 명을 채용할 수 있는 작은 단체에서 나 한 명 빠지는 자리가 클 것을 알기에, 나는 '자의식 과잉'의 게이지를 높였다 줄였다 하며 마음을 졸였다.

 

  먼저는 기쁨이 사라졌고, 그다음은 의미였다. 기쁨이 없는 와중에 아빠의 죽음이 있었다. 아빠의 죽음은 '아빠의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한동안 그 표현되지 않는 죽음이라는 것이 매 순간 내 숨에 붙어 다녔다. 내 살갗에 너무 가까이 닿아 있었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미워졌다. 죽음 앞에 그 어떤 것도 의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남아 있던 의미마저 사라졌다.

 

그렇게 잘 견디고 지내왔었는데, 왜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하는 걸까. 더 못할 건 뭐야, 라고. 내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었다. 2018.01.03 일기

 

  사실 그렇게 된 지 2년이다. 나는 그러고도 2년을 더 '버텼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건 내 일터와 동료들을 위해서라기보다, 내 일터를 통해 사회와 접점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기보다, 그러니까 숭고한 가치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했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내 인생이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고 생각했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역겨웠으면서도 나는 이 일을 마지막 남은 내 생의 지푸라기처럼 붙들고 있었던 거다. 2년. 그 2년간 내가 놓지 못한 것은 일이 아니라 삶이었다.

 

나는 반발하며 살고 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직장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에너지를 쏟아 현실을 바꿔보려고 하는 그 모든 움직임을 역겨워하면서도. 나는 그 삶이라는 것에서 내가 멀어져 버릴까 봐, 이것이 아니면 내 삶이 그저 죽은 듯 모든 것을 관조하기만 하는 유령처럼 되어버릴까 봐. 이곳이 마지막 끈인 양 손에 꼭 쥐고 지하철을 탄다. 나는 왜 이렇게 거슬러 살고 있을까. 무엇에 반발하고 무엇을 이기려고 이렇게 살고 있을까. _6월 9일의 일기

 

  다시 목과 어깨에 통증이 오고, 앉아서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2시간. 8시간 근무는 꿈 같은 일이 됐다. 2시간이 지나면 어지럼증이 찾아온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서는 팔이 욱신욱신 비명을 지른다. 몸이 말하고 있었다. "그만해라. 좋은 말로 할 때." 나는 그제야 그 말을 듣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을까

  한창 '내가 나약한 건 아닐까, 좀 더 버틸 수 있는 건 아닐까,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다들 조금씩은 아픈데 참고 사는 것 아닐까, 그러면 나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라며 나 자신을 괴롭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2월의 어느 밤엔, 나에게 "환자분은 너무 예민하고 나약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한의사를 죽이는 꿈을 꿨고, 꿈에서 깨서는 '내가 나 자신을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에서 한 발짝 벗어난 것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주5일 꽉 채워 일하지 못하면, 차라리 그렇게 할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뽑는 게 나은 게 아닌가 걱정한다. 만약 내가 딱 주3일 만큼의 일을 할 수 있는 몸이라 그만큼만 일을 하면, 그만큼의 성취를 할 것이고, 그러면 누군가가 나를 비난할 것만 같다.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를 비난할 것 같다. 게으르다고 할 것 같다. 세상 누구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너는 나약하다고. 네가 몸담고 있는 조직 또한 나약하다고. 그렇게 해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거라고, 한길만 가도 모자란 게 삶이라고 말할 것 같다. 나는 이제 중요한 일에서는 빠져야 할 것 같다. 중요한 일들은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주변적인 것들만 해야 할 것 같다. 모자란 사람이 되는 거다. _ (정신병이 심각하던) 2월 12일의 일기

 

  다행히도 나는 나 자신을 정신적으로 자해(하며 몸 또한 학대하고 있었다)하는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몸이 극단적으로 아프니, 이제 그런 식의 학대는 멈출 수밖에 없다. 삶의 다른 방식을 찾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일에 보이던 집착에 가까운 욕심을 그만두었다. 휴직이지만 '이대로 퇴직이어도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그동안 모아뒀던 한 무더기의 책과 자료들을 처분했다. 자꾸만 '그래도 언젠가 볼 일이!' '그래도 혹시 복귀하면 참고가…' '쉬는 동안 조금이라도 보면 도움이…!' 등의 생각이 올라왔지만 과감하게 처분했다.

 

  그러는 중에 내 몸은 여전히 살아있고 부단히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물리치료를 받고 빨갛게 남은 자국들이 하루 이틀이면 옅어지며 새살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사 자국도 그렇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팔에 남은 울긋불긋한 자국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렇게 애써주는 몸의 속도보다 조금만 느리게 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일을 그만둬도 내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 일은 내가 아니다. 내 삶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나는 그 일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다. 지금껏 잘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 할 수 있다. 맹렬하게 나 자신의 소리를 듣자. 곤하면 멍을 때리고, 답답하면 걷고, 글자가 읽히지 않으면 책을 덮고, 졸리면 참지 말고 자 버리자,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저 내가 되자.

  이런 게 잘 안돼서… 여기에 이렇게 눈에 보이는 글씨로 줄줄이 적어 넣어본다.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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