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외쳐보자. "나-는-못-해-요-!"
늘 마음이 앞선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내고 싶은 것도 많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해왔고, 해내고 싶은 것들도 해내 왔다. 아마도 나는 그동안 내 미래의 시간과 체력을 당겨서 살아온 것 같다. 그게 욕심인 줄은 몰랐는데, 욕심이었다는 걸 몸이 아프고야 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유령을 따라가다 넘어진 사람 같다. 자꾸만 내 몸을 버리고 저 멀리 가버리는, 나라는 유령.
어제 만난 친구와는 카페에서 채 30분도 앉아있지 못했다. 어지럼증이 빙글빙글 내 눈앞에서 친구를 돌리며 놀았다. 조금씩 조금씩 빠지다가 얼굴이 안 보이는, 나중에는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기어이 참석한 모임에서는 괜찮은 척하는 데 에너지를 쏟다가 실패했다. 건강한 몸들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 잘 쉬고 회복하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들의 따뜻한 말이 고맙다가도, 낫지 않으면 어떡하지? 쉬었는데도 낫지 않으면? 쉬었는데도 회복되지 않으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숨 가쁜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사회생활'에 실패한 채 무거운 머리를 이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이런 내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더 어지러웠다. 나는 점점 더 내 고통을 감각하는 것 이외의 모든 자극에 자꾸만 무감해지고 있다. 당분간은 혼자 아픈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치유를 원한다면 부정적인 사고의 힘을 모으는 것이 필수적이다. 부정적인 사고는 현실주의를 가장한 슬프고 비관적인 시각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무엇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무시했는가?", "내 몸이 무엇에 대해 아니라고 거부하고 있는가?" 같은 질문들을 기꺼이 고려하겠다는 시각이다. 게이버 메이트,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 422쪽
7월 중순부터 10월까지는 성우학원 등록도 미루기로 한다. 가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풀리고,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그 자체로 '전환'이 되어준 내 유일한 취미. 에너지를 뿜어내야 하는 그 취미도 지금은 사치다. 우스운 건 내가 누구를 이기려고 학원에 다닌 것도 아니었으면서 뒤처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뭘까, 나는 왜 이런 기분이 들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친구들에게 뒤처질까봐가 아니다. 나는 내 인생에 뒤처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 이런 몸으로도 모든 것을 극복하고,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쉬지 않고 다닐 수 있어야 무언가 이루는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이렇게 다니다 안 다니다 맥을 놓쳐서는, 아무 의미도 없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거짓말 때문이다. 웃음이 난다. 성우가 되고 싶어 시작한 일이 아니다. 이루고 싶은 게 없어도 유령은 이렇게 제멋대로 날뛴다.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
아픈 건 필연
사람들은 으레 나에게 "몸은 어떠냐?"라고 애정이 섞였든 섞이지 않았든 묻는다. 나는 그 질문을 들으면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프고, 그 고통은 어떤 것이고, 그래서 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설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인정을 구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자발적으로 사회적으로 규정된 환자의 태도*를 취한다. "꾀병이 아니구요. (꾀병 아님) 게으르거나 의욕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정말로 아픈 거랍니다. (진짜 아픔) 운동도 하고 했었는데 (예방조치 있었음) 이렇게 된 걸 보면, 일이 너무 과중했나 봐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외부에서 찾아온 질병임) 병원에 다니고 있고, 열심히 치료도 받고 있답니다. (맹렬한 조치 중) 그러니 지금은 좀 쉬어도 되지 않나요?" 나는 그 인정을 받아야만 발을 뻗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습게도 내가 나에게는 쉬이 해주지 못했던 그 인정을, 나의 밖에서는 조금은 더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입을 열어 설명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 내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다. 내가 그렇듯이, 이 사회도 아픈 이를 앞에 두고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괜찮아질 거에요. 빨리 나으세요. 이것을 먹어 보세요. 저 병원에 가보세요. 운동은 하나요?" 내가 그렇듯이, 우리는 할 말을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이런 말들. 아픈 것을 열렬히 부정하는 납작한 말들을 겨우 생각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세상에 대고 대답과 인정을 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게다가 아프다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거나, 어느 정도로 아픈 것인지 자꾸 떠보려는 사람을 만나면 끝도 없이 서러워지는 것을. 내가 아픈 것이 미워지는 상황에는 나를 노출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 속의 유령이 또 나타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분함과 억하심정에 눈물 흘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질병이나 죽음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겪어낼 수 없을 때 비극이 된다. _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11쪽
나는 아픈 것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내 마음과 싸운다. 아픈 몸과 아픈 몸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와 싸우고, 다른 사람이 나를 '아픈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까지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끙끙대는 나와 싸운다. 결론적으로, 가만 보면 실체 없는 허상들을 잔뜩 세워놓고 그 앞에서 씨름하고 있다. 가끔은 몸이 아픈 것보다 이 싸움이 더 고되다. 그저 아프면, 아프면 되는데도. 그걸 못 하는 거다.
부담감은 점점 더 심해진다. 집에 들어앉아 있으니, 저 밖에서 바삐 무언가 하고 있을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것 같은 기분에 왠지 모를 불안이 싹튼다. 원래 그렇게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었으면서, 좀 더 많이 사람들에게 연락하고, 좀 더 자주 사람들을 만나고, 좀 더 넓게 소통의 면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차오른다. 이렇게 유령은 시도 때도 없이 슬그머니 다가와 안 그래도 아픈 내 어깨를 짓누르고, 나를 둘러싸곤 길을 터주지 않는다. 숨길을 막으니 후우우우- 깊은숨을 쉬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내가 영영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나는 언제든 아팠을 것이다. 나는 내 몸을 돌볼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아픈 시간을 보내게 된 건 필연이다. 그러나 아픈 사람들은 죄다 숨고, 아프지 않은 사람들만 정상인 양 소개되는 이 세상이야말로 정말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 내 안의 유령은 내 모습을 하고 내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내가 아니다. 이 사회가 굴러온 겉만 번지르르한 방식 그 자체, 그게 내 모습을 하고 나를 호령한다. 이런 사회에 너무나 잘 적응한 나 같은 사람들은 아플 수밖에 없고, 아파지면 땅바닥에 나뒹구는 버려진 부품이 된다. 그 방식 그대로 자신을 길들여 왔다면 이렇게 나처럼, 자신의 삶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머리를 쥐어짜는 정신병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돌봄 일지 ※ 숙제가 아님 ※
휴직은 휴직이고 생활은 생활이니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 사무직인 것이 씁쓸했다. 그나마 찾은 것이 육체적 부담이 없는 펫시터 일. 강아지나 고양이를 돌보고 나서 일지를 적어 집을 비운 보호자들에게 전달한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일을 시작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프로 펫시터'의 마인드로 상세하고 애정이 듬뿍 담긴 일지를 생산해내고 있다. 그러다 끔찍해졌다. 모든 일에 이렇게 조건반사처럼 열심인 내가. 남에겐 그렇게 마음을 쏟으면서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한 내가. 그래서 펫시터 일지를 따와서 내가 나를 돌보는 <돌봄 일지>를 쓰기로 했다.
한 열흘을 빠지지 않고 스트레칭에 운동을 하고, 하루 세끼와 1.5리터씩의 물을 챙겨 마셨다. 꼬박 열흘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열 하루째 되는 날, 유난히 마음이 울적했다. 몸이 아파서였다. 몸에 두드러기가 돋았고 더운 날씨에 그게 가라앉지도 않는 데다, 뻣뻣한 어깨와 근육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 무겁고 또 무거웠다. 계속해서 '왜 이러지?'라고 물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 나 아프지. 아픈 게 정상이지. 나는 내가 열흘 만에 건강해진 줄 알았다. 열흘을 꼬박 이렇게 살았으니 아프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겨우 열흘이다. 나는 자꾸 내가 아프지 않은 게 기본값이라고 착각한다. 그때 들춰 본 돌봄일지가 말해줬다. "아니야." 나는 서서히 나아지는 중이지 다 나은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이 흘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 유입이 있으면 유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흐름의 모든 양상이 다 통제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일은 전투가 아닙니다. 그건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한 밀고 - 당기기 현상이고, 상충하는 힘들을 반죽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게이버 메이트,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 416쪽
열흘이 지나고 보니 몸의 상태에 좀 더 집중하려고 했던 취지와는 달리, 일지 자체를 일과로 하는 나를 발견한다. 와, 정말 너무 열심히 사는 게 제일 문제야! 기록을 위한 기록이 되지 않으려면 기록하는 것보다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을 더 갖자고 다짐한다. 더불어 내 안에 가득 들어앉은 긍정의 말들, 해낼 수 있다는 격려들,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 끈기 같은 것을 그러모아… 개도 주지 말자고 생각한다. 그냥 저기 저 잡동사니 통에 잔뜩 넣어놓기로. 자, 지금쯤 왔으니 다시 한번 외쳐보자. "나-는-! 못-해요! 안-해요-!" "네- 맞아요-! 저 게으름뱅이예요-!" "네- 저- 아-파-요- 믿든지-말든지-!"
내 몸은 점차 나아지겠지만, 늘 돌봐야 할 것이다. 최고치로 아프지 않게만 관리해가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최근에 가까운 몇몇 사람에게 내 몸이 어떤지는 묻지 말아 달라고, 이유를 붙여 정중하게 부탁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냐고 물어오는 사람에게는 "실례가 안 된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될지" 되묻기 시작했다. "저는 그냥 아파요, 병명은 많은데 뭐 하나 설명하기가 어렵네요"라고, 자꾸만 밖을 향하는 내 눈과 마음을 내 안으로 들여놓는다. 지금은 그저, 아프면 아픈대로 옴-팡- 아플 때다. 안 아픈 척 시간을 때우는 건 하지 않으련다.
2019.08
* 발전하고 진보했다는 우리 사회에서 각 사람은 자신에게 특화된 사회적 역할(교사, 경찰, 의사, 목사, 판사, 변호사 등)에 해당하는 의무와 규범적 기대에 맞게 행동한다. 이 사회의 생산지상주의 이데올로기는 '뺀질이'와 '게으름뱅이'를 규탄하는데, 환자는 일단 (생산에서) '탈퇴한 자'다. (...) 자신이 사회적 의무를 피해 달아난 '탈퇴자'나 '게으름뱅이,''트러블 메이커'가 아님을, 또는 자기 앞가림을 사회가 대신해 주길 바라거나 '지원'을 노리는 '꾀병쟁이'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은 환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환자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들을 연출해 보여야만 한다.
1. 경제적/사회적 의무를 감당할 수 없는 환자는 결코 게으르거나 의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건강 상태 때문에 명백히 그럴 수 없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2. 그러한 건강 상태에 환자 자신의 책임이 없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합리적으로 기대할 만한 예방 조치를 빈틈없이 취했다는 증거 등)
3. 건강을 회복하고 경제적/사회적 의무를 다시 감당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고 있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환자는 자기 상태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가만히 누워 계세요"유의 명령들을 순순히 따르고 있음을 타인들에게 보여 줘야만 한다. 그는 어떻게 해도 자신의 의지로는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환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인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격을 갖춘 의료진(일반의나 전문의)에게 적극적이고 진심 어린 태도로 도움을 구하고 의료진에게 협조하여 병이 낫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연출이 환자의 사회적 역할을 규정한다.
_ 뤼방 오지앙, <나의 길고 아픈 밤>,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