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온 동네의 도서관에선 사탕 냄새가 난다. 1층 입구에서부터 단내가 폴폴. 입안에 넣으면 팝팝 터지는 팝핑사탕 분홍색 맛 냄새다. 뭐 이런 도서관이 다 있어, 유치하게 단 냄새로 사람 홀리겠다는 거야 뭐야? 단번에 홀렸다. 첫 방문에 팝핑사탕 냄새면 말 다 했지. 이거 기획한 사람은 시장상 같은 거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탕 냄새 같은 거 안 난다고 해도 도서관은 부족할 게 없는 곳이다. 일단 도서관은 전국이 다 비슷한 룰을 가지고 있는 듯 한데 그것부터가 남달라 좋다. 운영 시간의 룰,
주말에도 문을 열어 지루함을 처단하고, 남들 다 출근하는 월요일엔 셔터를 내린다.
겉보기엔 고상한 선비마냥 보이지만 도포 속에 도끼를 감춘 것 같다. 지루한 주말 처단! 월요일엔 휴-관! 특히 저 월요일에 휴관이라는 점이 멋있다. 저건 남들 쉬는 주말에 일했으니 쉰다는 소극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지루함을 처단한 그 기세를 몰아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좀비 같은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일종의 결단 같은 것! 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도서관은 그런 강단이 있으면서도 너무나 자비로워서, 나 같은 연체 인간에게 책은 안 빌려줄지언정 문을 닫지는 않는다. 이번에도 도서관 가는 가방만 무겁고 나오는 길은 허전할 뻔했는데 어린이 도서관에 들어가 낄낄대고 나오는 마음이 푸근했다. 아, 도서관은 흩날리는 도포 자락에서 팝핑사탕 분홍색 맛 향이 나는 곳!
주제넘지만 도서관의 비밀을 하나 누설하자면, 도서관의 핵심은 사실 어린이 도서관인 것 같다. 사실상 재미있는 책은 90%가 어린이 도서관에 있는 것이다. 읽어봐야 당장의 생활이나 공부, 특히 돈 같은 것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책이 전부 다 여기에 있다. 이 핵심 중의 핵심을 숨기려고, 어린이 도서관은 대담하게 1층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그냥 지나치기 쉽게 해놓은 것이다. 사실 자동문 한 겹만 열면 어디 정글의 초원이 따로 없는데. 벽에 동그랗게 파진 구멍형 소파에 들어가 있는 다람쥐 같은 어린이, 신발 벗고 올라갈 수 있는 코너에 곰처럼 앉아 책을 먹는 어린이, 기린처럼 목을 빼고 서가를 살피는 어린이.... 다 똑같은 모양으로 앉아 책을 보는 어른 열람실보다 훨씬 자유롭고 다채로운 모습의 독서가들이 자기만의 우물을 파고 있다. 들어가서 어슬렁거리자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져서 아무 책이나 늘어놓고 보게 된다. '이게 책 읽는 맛이지' 싶은 순간들은 어린이 도서관에서 더 자주 만나는 것 같다. 홍홍거리며 조금 웃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린이 도서관에도 긴장감은 맴돈다. 다만 빡빡한 공기로 차 있는 어른 열람실과는 또 다른 느낌인데, 어딘지 조급함이 묻어나는 그런 긴장이라기보다는 자기만의 세계에 온통 빠졌을 때 나오는 고요에 가깝다. 그 고요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스팟인 코너의 소파는 이미 만원이다. (사서 선생님의 사각지대) 등에 '태권도'라고 쓰인 옷을 입은 작은 뒷모습이 또 다른 작은 뒷모습에게 "야, 이거 봐." 속삭일 때는 서로의 고요를 깨지 않으려는 긴장감이 흐른다. 그의 엄마 말로는 '읽지도 않는 책을 이렇게 많이 빌려 가는' 모험가도 사실은 매주 이 도서관의 고요를 실어 나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흩어지기 마련인 것을 매번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야심이다.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것이 일단은 보물인 것을 꿰뚫고 있는 야심가. 그는 언젠가 한 번은 꼭 고요의 반출에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독서가들은 전부 남의 삶 살지 않는 또렷한 얼굴을 하고 있다. 또렷하고 맑은 얼굴을. 눈이 또렷하고, 마음이 맑은 얼굴.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책들이 어질러진 듯 꽂혀 있으니, 되도록이면 여기서는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달려들기를 포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두 손 모아 행운을 빌고 마음을 다해 책등을 훑어나가는 수밖에. 그러나 어린이 도서관에 들어와 '무슨 책 읽어야 되느냐'고 묻는 게 어른들뿐이고 '그 책이 어디 있는가' 헤매는 것도 어른들인 것을 보아서, 또 어찌저찌 책을 골라 꺼냈다 한들 정작 읽을 줄 모르는 것까지 보자 하면 어른들은 매주 어린이 도서관을 찾아 책 읽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나만 해도 고작 30년 남짓 살고도 머릿속에 선입견이 가득하니까. 글자로 된 책을 읽으라하면 음미하지 못하고 겉만 핥는 습관이 깊이 들었으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린이 도서관에 오면 글자가 문제가 아니므로, 글자만 읽다가는 어... 어? 하다가 책이 끝나므로, 끝났다고? 싶어서 다시 들여다봐도 글자만 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으므로 적잖이 당황 한 번 하고, 책 읽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나는 "뭐야, 시시해" 같은 소릴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어린이들에게 조금 창피해서, 더 볼 것이 있는 척 그림을 보다가 몇 번이고 들여다봐도 좋은 그림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게 왜 이렇게 좋은지' 생각하면 할수록 더 좋아져서 책을 못 덮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한낮의 열기를 피하여 평온한 시간에*
물고기가 바람을 타고 헤엄**치는 걸 보고 왔다.
한참을 봤다.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오래오래 책을 못 덮고 있다 보니 파도가 왔다.
모래사장을 훑듯이 내 마음 어딘가를 시원하게 씻기고 갔다.
웃음이 났다.
*한성민, <조용한 밤>, 사계절, 2018
**유미정, <물고기가 댕댕댕>, 웅진주니어,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