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라이프 2020. 9. 10. 19:08

사진 출처 Unsplash, Hans Peter

 

  성우. 어디에나 있는데 아무 데도 안 보이는 사람들. 나는 이 사람들이 반갑다. 어딜 가나 마주치는 목소리들이 반갑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느낌을 가지고 이 방송을, 이 안내를, 이 광고를 녹음했을까 생각하다 보면 칙칙한 회색 도시에 깃털 색 영롱한 새 한 마리가 날아드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버스, 지하철, 거리, 어디에서든지.

 

  인생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봐!”라고 수도 없이 쏟아지는 거짓말 속에서 ‘어떻게 나는 나만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싸우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을 시작할 때와 달리 마지막 장을 쓰고 있는 나는 직장을 그만두어 무직자가 되었다. 이제 직업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데다, 직업 성우가 될 확률도 여전히 없는 축에 속하지만 학원은 계속해서 다니고 있다. 그냥, 이게 지금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직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그 싸움이 성우 학원에서 대판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직장을 그만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돈을 떠나서, 그게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 같은, 말하자면 지푸라기였다. 하도 ‘의미 있는’ 일을 했다 보니, 일을 그만두는 그 즉시 내 삶이 의미 없는 삶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만두었다. 내가 또 다른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용기가 생겼을 때였다. 당연히 그 용기는 다른 내가 되어 볼 기회들 속에서 생겨났다. 나는 퇴직을 했고, 인수인계를 했다. 뒤늦게서야, 일을 그만둘 용기는 있었어도 내 사랑하는 동료들과 헤어질 용기는 1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대책 없게도 대책은 없다. 일은 벌어졌고 나는 아직 동료들과 헤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많지 않은 퇴직금에 살짝 기대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퇴직금이 좀… 진짜 많지 않아서 곧 푸드덕하고 쓰러질 건데, 어디로 쓰러지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성우로서는 가망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들이 오롯이 내 것이라는 건 안다. 나는 배우고 있다. 내 인생은 내가 말하고, 내 인생의 마이크도 내가 잡는 것이라는 걸. 내 삶으로 쓰이는 나의 문장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걸.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이 말했듯이 ‘저마다의 바둑’이 있고, 어느 요가 선생님이 말했듯이 ‘저마다의 수련’이 있는 거다. 그래서 기쁘다. 나는 내 목소리, 내가 가진 것 안에서 나만의 훈련, 수련, 배움을 한다. 결코 남의 것과의 경쟁이 아니다. 이게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실패한 소설도 소설이고, 누가 뭐래도 작가는 그 소설을 쓰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되듯이*, 내 삶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난 그게 맘에 든다.

 

  모든 사람의 삶은 각자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그 길을 가려는 시도며, 좁은 길로의 암시다. 일찍이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쓴다. 누구는 모호하게, 누구는 명료하게,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쓴다. _KBS 무대 <아내가 사라졌다> 중에서**

 

 

 

 


* 김연수 지음,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중에서

** 2019.11.23.방송. 극본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