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 목소리는 내 캐릭터를 완벽히 표현하고 있다
우리 학원 선생님들은 프리큐어 출신이 많다. 프리큐어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올드…) 네일큐어 아니고 패디큐어 아니고 프리큐어.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마법전사수가 제일 많은 걸로 기네스북 기록을 세웠다는 이 전설의 만화는, 평범하게 살던 소오녀들이 초능력을 가진 프리큐어라는 전사로 변신하여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응, 하고 싶은 말은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무척 고우시다는 것. 이들 얼굴을 보라. 어떤 소리가 나겠는가. 나는 매주 수요일, 이 프리큐어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혹시 삶의 태도가 소리에 반영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들은 진짜 우아하고, 기품이 있으시고, 수업 하실 때도 학생들 각각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이지 ‘아름답다.’ 격려는 기본값! 나의 똥 연기에도 일단 격려부터 날아온다. 안 되는 부분을 짚어주실 때는 날카로워도, 그게 결코 찌르는 날카로움이 아니다. 등을 밀어주는 날카로움. 거기에 학생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까지. 아, 곱다, 고와.
“음… 해준이가… 의외로 고운 소리가 안 나는구나?” 고민스러운 선생님의 표정. 어찌나 고운 소리로 말씀하셨는지, 저 팩트는 폭력이 되지 못했다. 아마 내 외양으로는 하다못해 고운 소리라도 나야 가진 밑천이 있는 것인데, ‘얘가 재능으로는 거지 중의 거지구나, 어떡하지.’ 고민하셨던 것 같다. 맞다. 나는 의외로 안 고운 목소리의 소유자다. 힘이 없고 얇으니 고울 만도 한데, 곱다는 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하지만 ‘삶의 태도가 소리에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는 내 추측이 맞다면, 내 목소리는 내 캐릭터를 100% 표현하는 중인 것이 확실하다.
곱지 않다. 내 삶의 지분은 분노가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 첫인상을 보고 “어머, 유치원 선생님 할 것 같은데~”류의 말을 칭찬처럼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정말로. 내 인생의 절반은 사람들이 내 외양에 기대하는 고움, 상냥함, 다정함, 순종적임,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상을 깨부수는 데 들었고, 그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내가 내 말에 뼛속까지 ‘친절함’을 장착해 놓은 것을 발견하곤 조정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는 남들 보기에 제압하기 쉬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용해 온 전략이 '친절'에 있는 것 같다.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요~” “너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에요~” “나는 언제나 너에게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공격하지 마세요.” 친절을 베풀고 그에 상응하는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착각한다. 아마 나의 이런 태도가 전남편을 포함한 몇몇 남성들에게 나를 ‘신붓감’으로 생각하게 했다는 걸 생각하면 열이 뻗쳐서, 갑자기 체질이 바뀔 것만 같다. (소음인에서 태양인으로.) 아무튼 내 고민은 이놈의 친절이 어디에서나 고개를 쳐든다는 것! 과학물이나 객관적 사실을 감정 없이 전달해야 하는 내레이션에서 자꾸만 친절한 억양과 분위기가 난다. 범죄 다큐 내레이션도 나에게 오면 인간 극장이 된다. “용의자는 그 시간에 왜 망치와 연장을 싣고 국도를 달렸을까~? 아이쿠 이런~ 무슨 짓을 벌일 모양입니다~” 순식간에 장르 전환. 감이 오시는지….
‘도대체 왜 이런 친절한 느낌이 날까?’ 한참을 고민했다. 문장의 끝을 뚝 떨궈 짧게 끊어보기도 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아보기도 하고, 단어 사이사이를 끌지 않으려 애써 보기도 하고…. 그러다, 어쩌다 알게 됐다. 내가 말할 때마다 내 몸이 먼저 앞으로 나가 있다는 것을! 아이고 이런. 나는 상대에게 나를 다 내어주고, 그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태도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할 때의 나는 보통 상체를 상대에게 기울이고 있었고, 실제로 몸을 내밀지 않는 경우에도 내 의식이 내 말보다 먼저 상대에게 닿아 있다. 어떤 (주로 쓸데없는) 배려의 의지가 담긴 비언어적 표현으로서의 친절은 “날 가져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 말도 그렇게 나올 수밖에! 하! 드라마 <미스티> 의 김남주 배우가 맡아 연기한 내 사랑 고혜란 앵커를 본 적 있으신지? 이런 캐릭터들이 자신의 의식을 남에게 뺏기는 것을 본 적 있던가? 그의 카리스마와 오오라는 상대에게 기울어지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견고한 자기의식을 온전히 자신이 컨트롤하고 있다. 상대에게 쉽게 키key를 넘기지 않는 것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목소리에 힘이 없으니 입에 바짝 긴장 하고 명확한 발음으로 힘없음을 보완하며 살던 습관도 한몫했다.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상대에게 또박또박 전달하려는 태도는 굉장히 모범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내 성격이 모범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그런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또 앞서 말했듯이 나는 ‘따박따박’이 아니다. 친절이 기본값이기 때문에 ‘조곤조곤, 또박또박’이다. 그러니 내 소리만 놓고 들어보면, 모범적인데 겸손하기까지 하다. 아이고. 때문에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서 그 녹음본을 들어보면 의도치 않게 의존적이고, 상대에게 답을 구하며, 주도권을 넘기는 성격의 사람 느낌이 난다. 그러면 선생님의 피드백은 안 들어도 라디오다. “해준이네~ 해준이가 녹음됐네.”
물론 친절은 실생활에서 크게 나쁠 것 없는 태도다. 누군가에게 일부러 싸늘한 느낌을 주면서 살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러나 어쩌면 이런 내 태도가 나 자신을 더 고되게 했을지 모를 일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상대의 아래쪽에 놓고 희생해가며, 나를 더 지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피곤케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내가 고른 이 전략이 적절한 생존전략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을 해칠 만큼 강하지 않아요”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할수록, 나는 더더욱 약자가 되었을 것이다. 단호한 내 마음이 단호한 목소리와 태도로 ‘표현’되지 않으면, 없는 죄도 뒤집어쓰는 게 이 세상이니까.
다섯째, 정신적.육체적 건강이다.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거의 모든 정보가 담겨진다. 손가락에 지문이 있듯 목소리에는 성문이 있어서 나이, 체형, 성격, 품성, 건강 상태, 심리 상태, 출생지, 교양 수준 등 많은 정보들이 드러난다. 목소리가 마음에 들게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봐야 한다. 또한 그때그때의 컨디션뿐 아니라 평소의 언행이나 태도도 바르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훌륭한 내레이션은 발현되기 어렵다. _ 박형욱.김석환 <내레이션의 힘 - 말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내레이터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조건' 다섯번째 중에서*
처음 학원 등록 상담을 할 때, 매니저가 나에게 공부의 목적을 물으셔서 이렇게 대답했었다. “안정적이고 힘 있는 목소리를 내고 싶고, 제 목소리를 좋아하게 되고 싶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내 목소리가 어떤 소리인지도 몰랐고, 유심히 들어본 적도 없었으며 노래방 가서 두 시간만 지나면 확 쉬어버리는 비리비리함이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나의 마르고 근육 없고 몸에 열없는, 해골 모양을 포함한 내 신체적 특성이 울림이 부족하고 호흡이 달리고 가느다란 소리를 만들었다. 몸에 힘은 없어도 지고 싶지는 않아 하는 성격이 희한하게 똑부러지는 발음을 장착하게 했으며, 때에 따라 무심하고 툭툭 반항하기 좋아하는 삐딱함이 어딘지 거친 소리를 만들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외양과 내면의 절묘한 부조화가 내 소리에 묻어 있다. 이 소리가 나다.
인간 옥구슬들… 그리고 꾀꼬리가 무엇인지 몸소 드러내 보이는 학원 친구들. 거기에 약간 허스키한 음색을 가진 친구까지. 이들은 그야말로 내 로망이었다. 이 친구들의 소리를 듣다 보면 노말(normal)중의 핵 노말인 내가 아무 색도, 맛도 없는 밍숭맹숭이같이 느껴져, 괜히 이곳이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 같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엔 무조건 따라 했다. 흉내 냈다. 그러다가 알게 됐다. 어차피 나는 남이 될 수 없고, 내가 가진 재료는 나 하나라는 것을. 부족해도 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특징이 왜 없는가? 스타일이 왜 없는가? 색깔이 왜 없는가? 내 목소리가 이렇게 완전하게 나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 소리가 단지 ‘목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내 삶의 흔적이 묻은 결과라고 생각하면 부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는 것이다. 남이 되려고 하지 말자. 남의 것을 가지려고 하지도 말자. 나는 나나 되자. 내 인생을 가장 적절한 소리로 표현해 낼 내레이터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이 목소리를 가진 나뿐이니까.
자, 나는 이제 더 열심히 고운 소리를 연습하기로 한다. 세상의 아름다움보다는 불의함에 더 눈이 가고, 분노가 일생의 동력이며, 앞으로도 불의에 눈 감고 살지는 못할 나는 맹렬하게 고운 소리를 연습해서 ‘조곤조곤 파이터’가 될 것이다. 조곤조곤이 고울수록 파이팅은 더 극대화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노린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 매주 화/목 나타납니다. 성-우로-드
* 박형욱, 김석환지음, <내레이션의 힘-말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예문아카이브, 2018. 내용은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