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어수선

도태된 인간의 새로운 삶

가마니라이프 2020. 5. 3. 10:31

 

  이야기는 바야흐로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조금 애매하게도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태어났다. 아예 80년대 한가운데도 아니고 그렇다고 90년대도 아닌. 생각해보건대 내 행동의 고루함과 그것에서 벗어나 보려 발버둥 치면서도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필연적인 것인가 싶다. 나는 ‘한 우물만 파라’는 식의 인생의 진리를 듣고 자랐고, 잘하는 거 하나! 그 영역에서 프로가 되어 평생토록 먹고 사는 것이라는 신기루를 좇도록 프로그래밍된 인생이다. 정적이고 멀티플레이가 잘 안 되는 나에게 딱 들어맞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시대가 바뀌고, 나에게 그런 시스템을 주입하듯 가르친 이들까지는 어찌어찌 그렇게 살았는지 몰라도, 나는 지금 내 삶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한 기점에 와 있는 데다가, 시바, 아직도 30대 초반이다. 이제 갓 서른이 넘은 것이다.

 

  대학은 왜 다닌 것인가. 꼬박꼬박 학자금 대출을 납입할 때마다 나는 묻는다. 물론 이 한국 사회에서 나같이 특출난 재능 없고 기술도 없는데 여자이기까지 한 인간이 대학까지 나오지 않았으면 지금 정도의 삶조차도 불가능한 것이었겠지만, 그냥 ‘대학을 나왔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득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그 졸업장이 매번 의아하다. 전공을 살릴 수 있었던 친구가 몇이나 있는가. 차라리 어떤 친구들처럼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준비했어야 했나. 고루하고 순진하게도 '대학은 대학이지!' 했던 내 청춘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고 딱히 대학에서 큰 학문을 배운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는 아예 "나 기업이오!" 선전하는 대학들을 보자면, 십여 년 전 내 순진함에 헛웃음이 난다. '얘, 너는 아주 크고 비싼 교양 학교를 다녔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무슨… 교양이 쌓였지? 참으로 애매하도다...!

 

  그런 내가 중간관리자가 없는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이마저도 필연인 걸까? 대표와 말단 직원들만 있는 단체들. 나는 그런 곳에서 일했다. 보통 그런 곳은 3~4년은커녕 1~2년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줄줄이고, 단체는 늘 대표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입사한 지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눈에 훤-히 보이는 대표의 수직적이고 독단적인 권한 행사. 거기에 의문을 품으면 고달파진다. 첫 사회생활에의 애정과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버무려 무진 애쓰던 청년들이 나가떨어진다. 바꾸려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질려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뭐가 먼저일까? 자꾸만 신입들을 데리고 일해야 하니 대표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대표가 그러니 자꾸만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걸까. 마치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묻는 것 같구나. 악순환이다.

 

  그러나 내가 단체 걱정할 때가 아니다. 비극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나 자신의 고통에 무감한 존재이자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으로 컸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얼마나 끔찍한 시너지를 내는 조합인지, 끝끝내 모른 채로 말이다. 나는 괴로워하면서도 일터를 떠나지를 못했다. 누가 주입했는지 알 수도 없는 이상한 삶의 전제들이 나를 붙잡기도 했다. '아픈 건 나약한 것. 1~2년 하고 그만두는 것도 나약한 것. 끈기를 가지고 한 우물을 파야 뭐라도 된다, 그러니까 버텨야 한다!' 아니 뭐지? 써 놓고 보니 이 박정희 정권의 잔재 같은 말은? 설상가상으로 나는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고, 거기 모인 모두가 그렇듯 나도 내 삶의 가치와 신념을 기반하여 일했기 때문에 일과 삶의 구분이 모호했다. 일을 그만두는 건 내가 삶에서 추구해오던 어떤 가치를 놓아버리는 것같이 느껴져서 더 그만둘 수 없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 가치의 중요성은 정말 그랬을지라도, 내 삶의 틀과 내가 일하던 단체들이 그걸 받아 낼 깜냥이 안됐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깊이 각인되었던 잘못된 전제들은 이 사회가 끊임없이 강화해 온 생존과 경쟁력에 대한 신화, 그 일부이자 자체였다. 알고 보면 그 신화 속에 자란 이들은 모두 나처럼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무한히 성실한 인간이 된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일하던 영역은 어쨌든 자꾸만 '더 나은 세상'을 얘기하는 곳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 더 나아질 가능성이 창창한 내 30대가 딱딱하게 굳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나는 초원 위에 발목 삐어 누워있는 사슴이 된 느낌으로 평생을 살았겠지. 물론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나는 정신 분열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과 단체를 꾸려갈 때 특히 더 그랬다. 내 속에 깊이 새겨진 전제들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면서, 우리가 우리의 일을 삶과 균형 있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들 앞에 매번 등장했다. 알 수 없는 찝찝함으로,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으로,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고 나약해 빠졌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육아하는 동료와 몸이 아픈 누군가도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주 3-4일제. 20대 후반-30대 후반인 우리가 충분히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정도로의 임금수준 개선. 복리후생 확대. 인생에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일들 속에서도 한 사람의 삶이 큰 흔들림 없이 이어져 나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결정들 앞에서, 나는 매번 쉽사리 ‘내 편’을 들지 못했다. 노동자이면서도 기업인의 입장을 내면화하고, 아프면서도 고용주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차별당하면서도 권력가의 논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배운 대로 하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너무 열심히 살다 손목과 어깨를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단체를 생각해서) 소정의 재활비를 받으며 휴직하는 것까지 망설였으니, 말 다 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사람은 깔끔히 퇴직해 줘야 새 ‘부품’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고민했고, 동료들에겐 더 부드러운 말로 이 입장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문장에서, ‘이런 사람’이 나라는 게 가장 끔찍한 지점이고.

 

  아프고 나서야 알았다. 아이고, 열심이 과했구나. 책임감 너무 과했구나. 그리고 보았다. 나 같은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장이 나서 나가떨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시대라는 걸. 한 가지에 코 박고 살다간 질식을 하거나, 가까스로 코 들어 눈뜨고 주위를 살펴보면 남은 게 그 코 박을 접시뿐인 게 이 세상이란 걸. 그런 우리에게 누가 자꾸 한 우물을 파라고 했던 것인가. 누가 '하면 된다'고 했으며 누가 '될 때까지 하라'고 한 것이며 나의 '열심'을 들먹인 것인가. 결국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다 내 책임으로 돌아올 전제들이다. 내가 일을 할 수 없는 동안 최소한 입에 풀칠은 해가며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준 건 이 사회와 시대가 아니라, 그것들을 거슬러 만들어 왔던 내 동료들과의 신뢰, 약속 같은 것이었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기계의 부품으로 보던 내 눈알을 닦고 또 닦아주던 내 동료들….

 

  컴퓨터 앞에서 주5일, 일 8시간 근무 같은 건 언감생심인 몸이 되었다. 제발...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성실히 한 우물을 파던 나는 이제 대강대강 여러 개의 우물을 판다.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가? "너 그렇게 일하다가는 아주 좆되는거야~"라고. 아, 그래 동료들은 말해주었다. 내가 듣지 않았지. 내가 스스로 불안해서 그렇게 나를 더 몰아쳤지. 그러니 필연일 수밖에 없었던 무너짐이, 일찍 찾아온 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일단 30대가 갓 시작된 이 시점에 접시에서 코를 들어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파트타임으로 가능한 일들을 여러 개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큰돈을 만져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 수준에 맞는 소비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직업이 곧 나고 내가 곧 직업이던 삶이 분열하고 있다. 나는 이제 내가 하는 일에 내 정체성을 뒤집어씌워 의존하던 방식도 버려야 한다. 심한 애착을 가졌던 내 직업도, 나의 전부가 아닌 일부가 되어 제자리를 찾고 있다. 비대해졌던 직업 정체성이 그저 나의 일부로만 자리 잡는 것이다. 내 일이 속한 분야가 아닌 다른 영역에도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고, 내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고민하게 되고, 일단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도 합격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시대에, 이거라도 어디냐! 그러나 역시 아르바이트에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었다(...)

 

  다른 방식. 다른 방식의 삶. 나는 절대로 내가 배워 온 얄팍한 명제들에 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끊임없이 벌고, 끊임없이 소비하고, 끝없이 쌓고, 대비하고, 준비하며 '일단 삶을 미루라'는 목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성공하는 거라는, 끝도 없는 욕심을 부추기는 말들은 무시할 것이다. 나는 일단 나나 될 것이고, 나로나 살 것이다. 아픈 건 아픈 거고 나약한 것이 아니다. 돈을 못 버는 건 가난한 거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와, 나는 이 2020년을, 내 인생에 너무나 맹렬히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부엌에서 반복되는 “Why do you always get up so late?”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 뜨끔하지만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다. 해피루비(가명, 58세), 우리 엄마. 그릇도 몇 없는 설거지가 끝나지 않을 정도로 영어에 몰입하는 저이가 나보다 더 맹렬한 것 같다. 갑자기 위축된다. 맹렬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 아닌가? 아앗! 또 비교가 시작됐다. 아무튼, 일단, 알바 먼저 다녀오자.

 

 

20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