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어수선/코타키나발루 유배기

15. 선셋헌터 A greedy person

가마니라이프 2020. 2. 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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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건 여섯 시 전후. 그것을 보러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 시내 쪽 도로는 오후 네 시 반부터 슬슬 막히기 시작한다. 다섯 시 반부터는 절정이다. 탄중아루 해변 앞 좁은 도로는 주차장이 된다. 나는 거의 매일 그 길 위에 있었고, 내가 탄 택시의 기사님이 아주 노련하게 우회로를 아는 사람이기를, 좀 더 일찍 도착해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를 손 모아 바랐다. 해변으로 향하는 길에 택시 앞유리 너머로 하늘이 조금씩 물들어가는 게 보이면, 나는 마치 한 번도 석양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마음이 조급해지고 빨리 가서 몇 분이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으로 마음이 그득그득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보는 석양이 매일 같이 다른 모습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아무도 해변에 오지 않는 날에도 미친 듯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석양이 있는가 하면, 하늘이 청명해 구름이 몇 덩이 없는 날이라도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저 덩그러니 붉은 해만 홀로 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다섯 시 반에서 일곱 시는 누구도 제 눈앞에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저 하늘을 쳐다보고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석양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모든 날에 '실패'란 없었다는 것이다. 석양은 정말이지 매일 아름다웠고, 나는 선글라스도 없이 눈에 까맣게 잔상이 남도록 하늘을 보는 게 좋았다.

 

  이곳에 오기 전엔 지는 해를 보면서 매일 울어버리는 것이 유일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야자수 잎을 들고 춤을 추는 커플 앞에서 울 수는 없는 법. 새하얀 치마를 흩날리며 하염없이 섹시한 사람이나, 구령에 맞추어 같은 동작으로 석양 앞을 씩씩하게 거니는 친구들 앞에서도 눈물은 안 나는 게 맞다. 나는 어느새 덤덤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며 그것들을 구경할 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태어난 지 정말 얼마 안 된 것 같은 작은 아기였다. 그 애는 모부가 자신을 물가에 내려놓자마자 겁도 없이 바닷물을 첨벙대며 놀았는데, 그러다 바다에서 해변 쪽으로 기어 나올 땐 마치 인간으로의 진화를 마친 생명체가 생명의 보고에서 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영화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 배경 음악이 들렸는데 아무래도 나만 들은 것 같다. 그러는 중에 나를 노리던 모기는 꼭 한두 번의 흡혈에 성공했으며, 개미들은 매일 같이 돗자리 위에서 파티를 벌였다. 아주 성가신 건 날파리였는데, 이들은 해변의 지형지물 중 가장 높은 내 머리 꼭대기 위에서 구애의 춤을 추었다. 정말이지, 석양을 보면서 눈물이 차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여기가 내가 원하던 바로 그곳이라는 걸. 나는 좀처럼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나에게 자꾸만 알려주어야 했다. 여기가, 거기라고. 눈물이 차오르는 경험이 쉽지 않을지언정, 내 계획과 다르게 자꾸만 틀어질지언정, 너는 지금 네가 원하던 곳에 와 있다고. 최면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 그것을 자꾸 잊는 경향이 있다. 돌아보면 내 직장도, 지금의 내 삶도 결국 내가 원하던 것이었고 처음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자꾸 기억해주기로 했다. 그러면 조금 뿌듯해지고, 조금 기뻐졌다. 또 한 번 내가 원하는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해변에 앉아있는 거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석양의 최고조를. 어떤 날엔 해가 아직 수평선 위에 있을 때 하늘이 물든다. 또 어떤 날엔 해가 다 지고 난 후에야 남은 빛이 내 등 뒤의 먼 하늘부터 물들이기 시작한다. 모두가 자리를 뜬 텅 빈 해변이 홀로 물드는 날엔 괜히 콧잔등이 시큰했다. 해가 다 지고도 30분은 기본이다. 나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리고 언제가 하늘이 가장 붉고 아름답게 물들었던 때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채,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서 돗자리를 접는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그날 녹화한 영상을 틀어보고서야 깨닫는다. 언제가 오늘의 최고조였는지.

 

  해변에 앉아서는 단 한 번도 맞추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를 수 있을까? 다 지나가고 나서야,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게 괜스레 억울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손해 본 것은 없다. 언제인지도 모른 채 기다리는 모든 순간에 버릴 것은 없었다. 온 하늘이 물든 그 순간이 아니어도 석양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나는 매 순간이 최고조인양 입을 벌렸다. 넋을 놓았다.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앉은 내 눈빛을 해가 봤다면 아마 지구 시간을 기준으로 지나간 자신의 하루가 무척 뿌듯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는 동안 알게 된 것 같다. 석양이 가르쳐준 것 같다. 언제가 내 생에 가장 빛나는 때인지 나는 몰라도, 버릴 순간은 하나도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