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편지 to 1999
얘, 해준아. 여기는 2019년 12월 10일이야. 너는 한 달쯤 지나면 서른두 살이 돼. 서른둘이라니! 그런 날이 오기는 온다, 정말로. 뜬금없지만 오늘에야 1999년의 너에게 편지를 보내. 왜냐하면 얼마 전에 내가 네가 쓴 편지를 받았거든. '2019년의 나의 하루.' 그게 네 일기장에 누렇게 바래서 붙어 있더라. 그 종이, 20년이 지나니까 정말 색이 바랬어. 20년! 나는 네 20년 뒤야.
2020년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와 보니, 우리가 과학 포스터에 줄차게 그렸던 '하늘을 나는 자동차' 같은 건 갑자기 등장할 것 같지 않아. 참 다행이지. 정말 우리 상상 대로라면 지구는 애초에 아작이 났을 거야. 아흐, 보통의 아이들도 다 그랬겠지만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매번 있었던 거-그게 참 괴로운 일이었던 것 같아. 아직 있지도 않은 먼 미래를 끄집어내야 하니까 자꾸 남의 걸 베끼게 되잖아. 생각해보면 내가 매번 그 포스터들에 그렸던 건 거의 외계행성에 가까웠지. 후후. 아무래도 너 아닌 누군가가 상상했던 최대한은 인간이라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아.
그래도 상상과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기는 해. 있지, 2011년에는 나사에서 화성에, 우리가 아는 그 화성에 무인 탐사선을 보내. 너무 먼 미래의 일 같지? 그게 더 먼 미래인 지금, 2019년이 되도록 화성에 있대. 내년 7월에는 드디어 사람이 탄 우주선도 간대. 와, 이렇게 써 놓으니 정말 꿈같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사된 보이저호들도 심지어 태양계를 벗어났어. 보이저 1호에서 빛의 속도로 오는 신호가 자그마치 20시간하고도 36분을 달려야 우리가 사는 지구에 도착한대. 그렇게 먼 곳에 갔대. 아주 먼 곳에…. 해준아, 나는 그런 곳에 살고 있어. 보이저호로부터 아주 먼 곳. 너는 아직 그로부터 가까운 곳에 살고 있고, 아직은 모든 것이 네 곁에 잘 붙어있지.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이 말이야.
몇 년 뒤에 너는 핸드폰을 갖게 될 거야. '카이 코코'라는 예쁜 이름. 빨간색. 세상에 있는 핸드폰 중에 가장 작다고 신나게 광고할 최신 폰. 아빠가 빨간 헬멧 쓴 졸라맨 핸드폰 고리도 달아줄거야. 그리고 그게 아직도 여기 있어. 안 버렸거든. 아빠한테 이걸 기억하느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았는데, 지금은 궁금하네. 그걸 사서 내 새 핸드폰에 끼워 주던 날 어떤 마음이었는지. 너는 꼭 스무 살쯤 그걸 한 번 아빠한테 보여줘. 이런 거 해줘서 고마웠다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아유, 아빠도 참. 돈도 없으면서 그런 걸 사주고 그래. 카이 코코, 그게 내가 살고 있는 2019년엔 상상도 못할 고물이 됐다고는 여기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상상 속의 나는 작가가 됐나 봐. 출판사에 원고를 내고, 집에 돌아와서 청소를 하고, 장을 봐서 식구들과 밥을 먹어. 그리고 가족들보다 30분 늦게 잔대. 책 읽어야 해서. 으하하. 물론 지금의 나는 작가도 아니게 되었지만, 이게 너무 재밌어, 과학 포스터에는 20년 후라고 해서 자동차가 날아다니는데 나는 아직도 손으로 쓴 원고를 출판사에 직접 내고 오는 아날로그 인간! 처음엔 이렇게까지 과목별로 상상력이 충돌하는 네가 웃기기도 했는데, 모르겠어. 그냥 그런 소소한 삶을 그렸다는 게… 네가 써 놓았던 20년 후의 내가 엄청난 사람은 아닌 게 그게 왜인지 고마워. 그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십 년을 더 살고, 삼십 년을 더 살고, 백 년을 더 살아도, 뭐 그렇게까지 발전된 사람이 되겠냐 싶어서. 그게 뭐 그렇게까지 용을 써야 할 일인가 싶어서.
해준아,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너는 아주 잘 살아갈 거라고. 실제로 너는 잘 살아간단다. 사랑니가 세 개나 나지만 썩기 전에 잘 뽑아내고, 심지어 스스로 가서 미리 뺄 만큼 용기를 내. 와, 진짜 너무 대단하다. 물론 가는 길에 벌벌 떨고 치과 의자에 누워서 주삿바늘도 아닌 공기를 뿜는 기계에 화들짝 놀라면서 말이야. 아참, 이제 가운뎃손가락에 펜을 받치는 것은 아예 삶이 되어서, 네 번째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는 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다 보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 번째 손가락이 알아서 펜을 받치네? 그냥 될 일이었나 봐. 그렇지만, 놀랍게도 알약은 아직도 못 먹어. 그러나 살아 있어! 그게 중요하지?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자, 그런 사람도 있는 거야. 그리고 또… 그래, 꿈에 그리던 첫사랑 같은 것. 열심히 하렴! 사실 지금 돌아보면 다 시간 낭비 같은데 네가 열심히 낭비를 해 줘야 지금의 내가 되지 않겠니. 너의 삶은 그리고 너의 세계는 여러 번 여러 사람들에 기대어 무너졌다가도 또 꿋꿋이 세워져갈거야.
아마 잘 엄두가 안 나겠지만 나는 실컷 문과를 했어. 정말 실-컷! 어쩐지 화성이니 보이저호니 하는 말들이 허공에 둥둥 뜬 것 같았지? 맞아. 그래서야. 그러니 너는 이과를 선택해 보면 어떨까? 아, 과학시간에 어떤 미래도 스스로 그리지 못한 사람은 계속 문과를 해야 되는 건가? 아… 아잇, 모르겠다. 아니, 나는 말야. 한참을 과학 같은 것과는 멀리 살아오는 바람에 이제는 엄두를 내기도 어려운 지경이 됐어. 있지, 매년 남극에 가는 월동대원을 뽑는데 문과 나부랭이인 내가 낄 자리가 없어. 요리사, 남극의 요리사가 이제 와선 제일 가능성이 높아. 그것도 지금부터 자격증을 따서 5년을 어디서 경력을 쌓아야 겨우 지원할 자격이 되는데, 그게 제일 가능성이 높다구. 울고 싶다, 해준아.
생각해 봐. 남극이나 우주에 가는 것, 하늘을 나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사실은 1999년의 너도 그렇지 않을까? 해준아 난 그저, 너의 지금과 너의 미래엔 그 누구도 네가 어떠해야 할지 규정하지 않기를 바라. 심지어 네 성격검사 결과까지도. 선생님, 상담사, 간호사… 그런 것이 주로 나오잖아? 타고난 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건데. 잘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네가 정말로 이 편지를 받는다면, 너는 무엇을 꿈꾸게 될까? 너는 잘 수긍하고, 수용하고, 이해하고, 돕고, 양보하는 사람이지. 그렇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길 바라. 고맙게도 그런 너는 어디서나 사랑받는 아이지만, 그렇지만, 사랑받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는 것도 기억했으면 해. 그저 언제나 너 자신으로, 너 자신으로 충만하게 살아있기를 바랄게.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갈 네가 매 순간 너이기를 바랄게. 그 순간순간을 걸어서 언젠가 만나자.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