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어수선/코타키나발루 유배기

4. 석양을 기다리는 마음 Sunset

가마니라이프 2020. 2. 27. 11:31

  '매일 석양을 보리라.'

계획이라고는 그것 하나였다. 그러고 싶었다. 지는 해가 아름답기로 손에 꼽는다는 탄중아루의 해변을 생각하면, 본 적도 없는 그 바다의 석양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매일 울고 싶었다. 지는 해를 보면서 매일 울어버리리라 다짐했다.

 

  첫날 부터 해변을 찾았다. 네 시부터 해변을 거닐며 여섯 시 넘어 지는 해를 기다렸다. 아직 하얀 햇빛이 시원한 해변에는 파도만 바삐 오가고 있었다. 얕은 파도가 해변 깊게까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니, 모랫바닥이 거울이 되었다. 조금 있으면 많은 사람들의 '인생샷' 근원지가 될 곳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한적하고 미지근한 말레이시아의 바닷물에 발을 좀 담그고, 풀밭 가까이 돗자리를 폈다. 근처에 있던 개미들이 파티 장소를 찾는 중이었는지 돗자리가 등장하자마자 그 위로 올라와 신나게 파티를 벌였다. 귀찮게 구는 녀석들 몇을 주기적으로 털어내 가며 자리를 지켰다. 한 시간이 훌쩍이었다. 개미들도 그랬겠지.

 

  나는 내가 왜 석양을 기다리며 앉아있는지, 석양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어떤 것인지, 또 이것을 보러 금세 북적이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잠깐동안, 지는 해가 하늘을 물들이고 거울이 된 젖은 모래 위에 빛났을 때, 그러니까 내가 앉은 지구의 한쪽 면이 태양이 아닌 저 우주의 어느 곳을 향하기 시작했을 때 정말로 눈물이 차올랐다. 아주 잠시였지만 계획대로였다. 어느새 사람들로 붐비는 해변에서, 석양은 거기 모인 사람들까지 아름답게 만들었다. 하늘은 끝도 없이 넓었고 우리들은 아주 작았다.

 

  오랫동안 좁은 하늘 아래 살았다. 내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지, 그런 곳에서는 나만 보이는데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나 자신이 점점 더 크고 무거워져서 도저히 짊어지고 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내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또 다른 누군가의 창문, 윗집에서 우리 집 천장으로 쏟아지는 오줌 소리, 길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자꾸만 작은 콧구멍 안에 코딱지가 껴. 좁은 하늘을 사는 내 시력은 점점 더 나빠졌다. 멀리 볼 수 없으니 나 자신만 보이는 게 당연했다. 사람들도 그런 듯 했다. 무엇보다도 숨이 가빴다. 나는 아직은 서울에서 가져온 가쁜 마음 그대로 해변에 앉아 있었다. 이곳을 한 번, 두 번 찾을 때마다 내 숨이 점점 더 느려지기를 바랐다.

 

  나는 그렇게 지구의 작은 땅덩어리 조금을 차지하고 앉아 끝도 없는 하늘 앞에 나를 두고, 한없이 작아진 내가 좋았다. 지금 여기 있는 내가 꼭 내가 아니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기 앉아있는 내가 나인 것이 좋았다. 우주의 작은 먼지 만큼도 안되는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게 좋았다. 지구인인 것이 기뻐졌다. 내가 영락없는 지구인이라는 게 벅찼다. 이 기후와, 중력과, 산소와, 대기와 압력에 딱 맞게 태어난 존재.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다 느껴지고, 가끔은 이 세상이 이런 세상인 줄도 모르고 태어나버린 내가 정말로 태어났어야 하는 존재인 걸까 묻게 되긴 해도, 나는 지구인이었다. 내가 지구인이고, 여기 앉아 이 석양을 보기에 적당한 존재라는 게 기뻤다.

 

  저 먼 곳의 네가 오늘 나의 낮을 밝히고 데웠다. 너는 나를 볼 수 없겠지만 나는 너를 본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의 대기를 넘어 숨 막히도록 끝없을 그곳에 있는 너를 본다. 고개를 들어서. 이제는 양쪽 모두 0.6도 되지 않는 내 약해진 눈으로도, 너를 본다.

 

  오랫동안 하늘 끝자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지는 해를 끝까지 보고 나서, 아니 해를 저기 두고 빙그르르 도는 지구를 상상하고 나서 주섬주섬 돗자리와 양말, 신발을 챙겨 모래를 털었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마음. 저 멀리 이제는 지구의 다른 땅을 비출 해를 생각하는 마음. 그런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고민했다. 지금 내가 선 이곳에는 어둠이 내린다. 누군가의 아침이 온다. 내게도 곧 다시 아침이 온다. 지구가 한 3만 번쯤 돌 동안 살아있을 나는 벌써 10,950번 정도의 자전을 살았다. 오늘 한 번의 자전을 더 살았다. 하루라는 것이 또 지나간 것이다. 내일 다시 저 해를 만나기까지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해변을 터덜터덜 걸어가 어딘가에서 저녁을 먹고, 나는 그저 내일까지 살아있다가 다시 저 해를 만나러 이곳으로 올 것이었다.